[시인의 마을] 팔레스타인에서
[시인의 마을]
팔레스타인에서는 올리브나무로 기름도 짜고 묵주도 만들고 반찬도 해먹는다고 한다 팔레스타인에 가야겠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했다 이유는 딱히 없다 운이 좋으면 가장 오래된 올리브나무를 볼 수도 있겠지 그 나무를 꼭 봐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누구든 자신보다 오래 산 나무를 보면 하고 싶은 말이 한두 마디쯤 생길 수 있고 올리브 비누로 손을 씻고 너를 만나러 갔는데 그래도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지는 않기로 했다 아무래도 요즘 같은 때에는 조심해야지 요즘 같은 때라니, 이 장면 속에서 나는 너를 지우고 우리가 마주앉아 있는 이곳 심야 식당을 지우고 가짜 벚꽃 인테리어 소품을 지우고 풋콩과 생맥주를 지우고 마스크와 손 소독제도 지우고 말씀과 믿음을 지우고 탱크와 대포를 지우고 올리브나무만 기억할래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산 올리브나무는 어쩌면 아무것도 기억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핸드폰을 꺼내어 팔레스타인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찾아본다 비행기로 열두 시간 십오 분,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도 팔레스타인에 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만나지 못할 나무는 아무렇게나 상상해본다 두꺼운 껍질과 줄기들 아무리 팔을 넓게 벌려도 품에 담기지 않는 나무둥치 빼곡한 이파리들과 작은 연노란색 꽃들 푸른 앞치마를 두른 알바생이 하품을 하며 가게 안 텔레비전을 껐다 그래도 자꾸만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었고 우리는 말없이 메뉴판을 들여다 보고 있었는데
-한여진의 시집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문학동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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