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돈선의 예술인 탐방지도 -비밀의 방] 67. 풍경은 풍경이다 - 백중기 화가
미술교사 퇴직 전업작가 몰두
2021년 백중기 스튜디오 건립
웅장함 동경 가로폭 2m 대작 눈길
백두대간 산행 새로운 시각 트여
서정적 그림 속 시적 이야기 풍부
부부, 풍경·인물 미술세계 구축
조모희 작가 첫발 22일 개인전
영월 연당리
오후의 영월 연당리 풍경은 맑고 투명했다. 서강의 가을은 붉음과 노랑, 그리고 주황빛으로 고요히 물들었다. 백중기 스튜디오 입구엔 노란 소국이 소담스레 피어 있었다. 청회색 건물 전면의 왼쪽 출입구로 가을 오후의 잔광이 내려앉았다. 그 짙은 회청색 문을 열고 나오는 이는 백중기 화가와 그의 부인인 조모희 화가다.
10여 년 전 내가 연당리에 들렀을 때, 지금 스튜디오 건물터는 남새밭이었다. 당시엔 상추 등속의 푸성귀가 남새밭에서 푸릇푸릇 자랐다. 그때 나는 백악 빛깔의 본채 건물로 안내되었다. 아래층 부엌과 거실을 지나 이층으로 오르면 너덧 평의 다락방이 나타났다. 그곳이 백중기의 아틀리에였다. 지금은 그의 아내 조모희 화가가 부엌 설거지를 끝내고 조용조용 이층 계단을 올라와,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는 곳이 되었다.
2021년 스튜디오가 새로 지어지고, 백중기와 그의 아내 조모희는 각자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아내는 그해 중학교 미술교사를 퇴임했다. 그리고 남편이 작업하던 공간인 다락방 아틀리에를 자신의 공간으로 꾸몄다.
2년 전에 일어난 변화의 시점은, 이 두 부부 화가에게 새로운 세계를 여는 출발점이 되었다. 백중기 스튜디오는 풍경을 그리는 방이고 조모희의 아틀리에는 인물을 그리는 방이다. 그 방과 방 사이로 나무다리가 놓여 있다. 백중기 화가는 조모희 다락방 아틀리에를 통과하여 아래층 부엌으로 갈 수도 있고, 안채에 계신 노모를 만날 수도 있다.
이 나무다리는 견우직녀가 만나는 은하수 다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낭만적인 이 소통의 다리는 두 화가를 연결하는 영혼의 통로인지도 모른다.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그림을 그리는 이 부부 화가는, 먼 은하 건너 구만리 장천을 훨훨 날아다니는, 자유로운 무한의 새가 아닐까.
백중기
그는 우리나라 풍경화가 중에서 으뜸 반열에 드는 화가이다. 그는 2000년부터 지금까지 29회의 초대 개인전을 열었고, 50여 회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그러니까 해마다 한두 번씩 전시를 연 셈이다. 그의 그림은 애호가들에게 소장하고 싶은 그림으로서 그 가치를 높이 인정받는다.
백중기의 초대전 계약을 따내느라 유명 갤러리들이 앞다투어 일정을 잡기에 분주하다. 벌써 내년 가을까지 전시가 꽉 잡혀 있다. 그 후는 작업 시간과 충전의 시간 때문에 일정을 잡지 않고 있다. 경제이론으로 보면 공급이 수요를 미처 대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만큼 백중기의 그림을 소장하려는 애호가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백중기 스튜디오가 세워진 이후, 그림의 사이즈가 커졌다. 가로 폭이 2m를 훌쩍 넘기는 대작이 많아졌다. 그림은 백중기 화가가 그토록 소망했던 저 태백산맥의 웅장한 스펙터클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늘 공간이 넓은 작업실을 소원했었다. 태백산맥은 백중기에겐 영혼이요 몸이요 장엄한 산맥의 교향곡이라 할 수 있다. 태백산맥은 백중기의 서사시이다. 게다가 그가 사는 마을의 소소한 풍경은 마음속 서정시로서 초록 잎을 틔우고 꽃을 피워낸다. 그렇게 백중기의 자연은 서로를 물들이면서 변화해 갔다.
백중기는 날 때부터 영월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강원대학교와 군 복무 기간을 빼고는.
앞으로는 서강이 흐르고, 뒤로는 야트막한 동산을 등진 백중기의 집은 고요하고 적막하다. 다만 캔버스 앞에 앉아서 굳은 물감 사이사이를 긁어대는 나이프 소리만 들릴 뿐이다. 사각사각, 드르르 드르….
젖은 물감은 먼저 칠해진 마른 물감 위를 덮기도 하고 비껴가기도 한다. 오직 그것만이 숨을 쉰다. 새소리도 들리지 않고,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고, 꽃잎이 낙화하는 소리도, 나뭇잎과 풀들이 눕고 일어서는 일렁임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미 그 소리를 백중기 화가가 다 삼켜버렸는지도 모른다.
소리를 먹은 화가는 어쩌면 그 소리의 색깔을 자연의 빛과 원초적 숨결로 토해놓고 있는 건 아닐까? 백중기는 그 소리를 시원이라 이름했다. 시원의 소리는 산의 맥을 타고 흘렀다. 계곡의 내처럼, 강처럼, 나무의 수액처럼, 돌과 바위의 결처럼 그 맥은 생명을 잉태하고 생명을 낳았다. 그 시원의 힘을 백중기는 온몸으로 그리고 싶었다.
1997년 미술교사 생활 10년을 마치고, 백중기는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물론 아내 조모희가 생활을 책임져야 했다.
백중기는 즉시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다. 홀로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능선을 걸었다. 벌거벗은 나무는 외로운 자신의 길을 무언으로 맞이했다. 그렇게 헐벗은 능선과 능선, 계곡과 계곡, 봉우리와 봉우리를 넘어 무작정 걸었다. 하루종일 물을 못 찾아 심한 갈증으로 입과 목이 탔다. 오랜 산행으로 무릎이 점점 아파왔다. 산에서 텐트를 치고 홀로 지내는 밤하늘은 아름다운 별들로 가득 찼다. 한 달이 지나자 식량도 바닥나고 무릎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산을 기어서 내려왔다. 눈물겨웠다. 그러나 하산했을 때의 풍경은 삶의 환희였다.
“그때부터 새로운 풍경이 밀물처럼 눈앞에 쓸려 왔어요. 온통 연두빛 세상이 파도처럼 일렁였어요.”
산행 후 백중기는 그림에 몰두했다. 백중기의 서사는 태백산맥과 강에서 이루어지고, 백중기의 서정은 영월 곳곳에 깃든 마을 풍경들에서 안개처럼 피어난다. 이 서사와 서정이 함께 어울린 그림엔 그림마다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예를 들자면, ‘장미다방’이란 이름의 그림엔 실제 장미다방의 주인 마담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림을 구매한 애호가에게 작가는 전설처럼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그림이 그래서 더욱 흥미롭다.
물론 대개의 풍경은 오직 풍경일 뿐이지만, 그곳에 어떤 내력이 숨어있다면, 얼마나 재미있고 풍부한 그림이 되겠는가. 그건 그의 그림이 서정적인 미적 감각과 더불어 서사적인 이야기가 함께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백중기의 그림이 서정적이면서 시적인 이미지를 자아내게 하는 까닭은, 이러한 풍부한 문학적 소양이 함께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백중기의 그림에 등장하는 달, 청색 밤하늘의 별, 감나무의 홍시, 낙화한 붉은 동백꽃, 노란 개나리, 자작나무 숲길, 마을 어느 집 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 눈보라 속을 달려가는 열차 등등, 그림마다 뭉클한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내년 2024년 3월, 춘천미술관 1·2층 전시관을 빌려 30회 개인전을 크게 열 예정이다. 대학 시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그때부터, 백중기는 춘천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다. 그곳은 백중기가 아내를 만나 사랑한 곳이고, 그곳이 평생 그림을 결심하게 된 첫 출발지이기 때문이다.
조모희
백중기의 아내 조모희 화가는 지금 가장 행복한 날을 보내고 있다며 환히 웃는다. 그러나 따뜻하고 선한 그니의 눈매는 그림에 대한 열정과 그리움이 느껴진다. 처음으로 남편 백중기가 쓰던 다락방 아틀리에에서 2년간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시작했다. 40여 점의 그림이 그려졌다. 모두 작가 자신의 초상이다. 초상 하나하나가 자신이 지나온 날들이 투영된 모습이다.
올 11월 22일, 조모희는 첫 개인전을 서울 인사동 라메르에서 연다. 나를 찾아 떠나는 이 ‘그림 여행’은 조모희 작가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고, 보는 이들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 조모희는 이제 백중기의 아내란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조모희 작가란 이름으로서 당당히 세상에 첫발을 내딛게 되는 것이다. 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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