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의 제왕' 톨킨이 네오파시즘 스승?…로마 전시회 논란

신창용 2023. 11. 9.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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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니 총리에게 정치적 영감 줬다는 톨킨 전시회 두고 시끌
톨킨 저작 읽는 멜로니 총리 [멜로니 총리 소셜미디어(SNS)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로마=연합뉴스) 신창용 특파원 =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리는 영국 판타지 작가 J. R. R. 톨킨의 사후 50주년 기념 전시회가 논란이 되고 있다.

9일(현지시간) 이탈리아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에 따르면 이번 전시회는 오는 16일부터 내년 2월 11일까지 로마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다. 이후 이탈리아 전국을 돌며 순회 전시회가 이어진다.

톨킨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반지의 제왕'은 1억5천만부가 팔렸고, 2001∼2003년 모두 세 편의 영화로 제작돼 전 세계에 판타지 신드롬을 몰고 왔다.

전 세계적으로 두꺼운 팬층을 보유한 톨킨을 기리는 전시회가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것 자체가 이상할 건 없지만 논란이 된 대목은 이것이 관제 행사라는 점이다.

이탈리아 문화부는 이번 행사에 25만유로(약 3억5천만원)를 후원했고, 전시회 개막식에는 조르자 멜로니 총리가 직접 참석해 축사할 예정이다.

멜로니 총리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성스러운 텍스트"라고 부를 정도로 톨킨의 마니아로 유명하다.

단순한 애독자 수준이 아니다. 그는 '반지의 제왕'이 자신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정치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줬다고 밝힌 바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이 "기괴한 집착"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멜로니 총리는 '반지의 제왕'을 일종의 경전처럼 대한다.

그는 2008년 청년부 장관 취임사에서 "'권력의 반지'에 의해 부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멜로니는 1992년, 만 15세의 어린 나이에 베니토 무솔리니 추종자들이 설립한 이탈리아사회운동(MSI) 청년조직에 가입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당시 MSI 필독서가 바로 '반지의 제왕'이었다.

톨킨은 인종주의와 나치즘에 반대한 인물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그의 의도와 무관하게 종족 간의 전투를 묘사한 '반지의 제왕'은 다문화주의와 세계화로부터 국가 정체성을 수호하려는 네오 파시스트들에게 깊은 영감을 줬다.

"깊은 뿌리는 서리에 닿지 않는다"는 톨킨의 문장은 MSI의 경구가 됐다.

멜로니는 '반지의 제왕'을 자신이 읽은 가장 특별한 문학 작품으로 묘사하며 "웅장하고 시대를 초월한 교훈이 가득하다"고 주장했다.

멜로니는 2012년 MSI를 계승한 이탈리아형제들(FdI)을 창당해 2014년부터 대표직을 맡았다.

그는 지난해 9월 총선에서 우파 연합의 승리를 이끌며 이탈리아 사상 첫 여성 총리가 됐다.

비토리오 스가르비 문화부 차관은 "총리에 대한 호의" 차원에서 문화부가 이번 전시회를 기획했다고 소개했다.

멜로니 정부는 공영 방송 라이(RAI)를 시작으로 각종 문화 기관의 수장을 정부와 이념적으로 같은 성향의 인사들로 줄줄이 교체해 문화 통제정책을 펴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런 마당에 극우파들이 이데올로기적 스승으로 떠받드는 톨킨을 기리는 전시회가 개최되자 야당은 정부가 문화를 통제하려는 또 하나의 시도라며 비난했다.

최대 야당인 민주당(PD)의 문화 대변인인 산드로 루오톨로는 "정부는 예술의 질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예술을 손아귀에 넣는 데 집착하고 있다"며 "문화는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젠나로 산줄리아노 문화부 장관은 전날 톨킨 전시회 관련 기자회견에서 톨킨이 극우를 상징하는 인물이냐는 질문에 "작가는 인간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싸워온 진정성 있고 성실한 보수주의자"라고 말했다.

그는 "사회가 인간을 바코드로 환원하려는 지금, 톨킨의 이러한 가치 수호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번 전시회에 도움을 준 영국 옥스퍼드대의 라틴어 교수인 주세페 페치니는 산줄리아노 장관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페치니 교수는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톨킨은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에 가까웠다. 미국에선 히피들이 톨킨의 서적을 애독했다. 이탈리아에서 우파들이 톨킨을 좋아한 것은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며 "이번 전시회에 정치적인 의도는 전혀 없다"고 했다.

chang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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