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의 세계 - 이종필의 과학자의 발상법] 과학의 이름으로 반과학을 행하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반과학주의자로 유명했다. 기후위기를 사기라 여겼고 백신에 회의적인 인물을 백신 관련 공직에 앉히기도 했다. 코로나19가 처음 창궐했을 때 관련 전문가들의 조언을 듣지 않고 가벼운 독감 정도로 치부했다가 골든타임을 놓치기도 했다. 병원에서는 산소호흡기가 모자라 의사들이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일지 선택해야 했다. 넘쳐나는 시신을 처리하지 못해 냉동트럭에까지 시신이 가득 담겼다. 유일 최강국 미국의 모습이 코로나19 바이러스 앞에 처참하게 무너졌다. 트럼프는 코로나19 정례브리핑에서 감염자 몸에 소독제를 주입하거나 폐를 청소하면 어떻겠냐는 망언을 내뱉기도 했다.
최고정책결정권자인 대통령이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일 수는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겠으나, 코로나19 초기 미국의 모습은 당장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본질을 신속하게 파악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특히 과학기술과 관련된 기본적인 소양이 21세기 정치지도자들에게는 필수교양이 돼 버렸다. 그만큼 과학기술이 우리 삶의 곳곳에 복잡하게 얽혀들었고,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폐해를 남길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지금은 반도체와 배터리, 인공지능 등 첨단기술을 둘러싼 패권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다.
2016년 모두의 예상을 깨고 트럼프가 미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저렇게 반과학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 자체도 놀라웠지만, 저러다가 저 나라에 큰일이 나는 건 아닐까, 세계 전체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런 걱정을 했던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국의 코로나19 초기 대처를 망친 트럼프는 예상한 대로 파리기후협정을 탈퇴해 버렸다.
내년으로 다가온 미국 대선에서 여론조사 결과 트럼프가 다시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는 소식을 들으니 다시 괜한 걱정이 앞선다. 미국 내에서 벌어지는 일은 매정하게 말해 내가 알 바 아니지만, 윤석열·트럼프의 투샷으로 한·미 정상회담이 벌어지는 상황을 상상해 보면 이들의 조합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솔직히 무서운 생각마저 들기 때문이다.
과학방역
럼피스킨병이 전국으로 퍼지고 빈대가 번지는데
내년 가축방역관 양성 예산은 ‘0’
윤석열 대통령은 트럼프 전 대통령과 같지는 않다. 적어도 대놓고 과학에 적대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 윤 대통령은 검찰총장을 그만두고 정치인으로 첫 행보를 시작할 때 반도체 전문가를 찾아갔다. 문재인 정부의 코로나19 방역정책을 ‘정치방역’이라 비판하면서 자신은 ‘과학방역’을 하겠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전 세계가 찬사를 보낸 문재인 시절의 K방역을 비판할 정도라면, 윤석열의 ‘과학방역’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꽤 기대를 갖기도 했다.
그러나 ‘과학방역’의 실체가 무엇인지 사실 나는 잘 체감하지 못했다. 비과학적인 ‘정치방역’을 벗어나 과학적인 방역에 성공했다면 다시 한번 전 세계 외신들이 찬사를 보냈을 텐데, 그런 소식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최근 우리의 상황을 돌아보면 ‘과학방역’에 의심까지 들기도 한다. 1급 가축전염병이라는 소 럼피스킨병이 충남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뒤 지금은 거의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얼마 전부터는 오래전에 자취를 감춘 빈대가 갑자기 곳곳에서 출몰해 방역업체들이 난리라고 한다. 아마도 빈대가 크게 창궐한 유럽 등에서 입국한 사람들로부터 옮겨온 듯하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의 ‘과학방역’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 과학의 원리가 반영된 방역체계가 작동하고 있다면 코로나19뿐만 아니라 가축전염병이나 빈대 정도는 철저하게 막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내년 정부 예산에서 가축방역관 양성 예산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가축방역관은 현재 적정 인원보다 800명 정도 모자란다고 한다.
과학기술강군
북 무인기에 뚫린 상공·구조장비 없이 사지 몰린 군인
대체 과학은 어디로 갔을까
‘과학방역’ 말고도 ‘과학경호’, ‘과학기술강군’ 등 과학이 들어간 용산발 워딩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대통령이 과학경호의 호사를 누리는 동안 핼러윈을 즐기던 수많은 청춘들은 도심에서 비명횡사의 변을 당했다. ‘과학기술강군’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북한 무인기에 서울 상공이 뚫렸고, 해병대는 아무런 구조장비 없이 장병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대체 과학은 어디로 갔을까.
너무나 상식적이고도 당연한 말이겠으나, 뭔가가 과학적이려면 단지 ‘과학’이라는 말을 붙이는 수준을 넘어서는 본질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특히 과학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의 방법론이기 때문에 ‘어떻게(how)’라는 질문에 만족할 만한 답을 줘야 한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검증된 인과관계에 따라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 과학적인 방식의 기본이다.
이런 맥락에서 과학적이라는 말은 민주주의와 비슷한 면이 있다. 민주주의에서도 결과가 아니라 과정의 방법론이 핵심이다. 북한이 국호에 아무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칭호를 붙이더라도 북한을 민주주의 국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에서도 제도와 절차를 무시하고 국민의 의견 수렴을 소홀히 하거나 국회에서의 대화와 타협을 무시하면 당장 독재정권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과학자들은 기질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최근 크게 논란이 되고 있는 김포시 서울 편입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여당에서 김포시의 서울 편입을 추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출퇴근 인구의 85%가 서울로 출퇴근한다는 주장이었다. 나는 도시문제 전문가가 아니어서 세부적인 사항은 잘 모른다. 다만 평범한 서울시민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김포시가 서울로 편입되어 ‘서울시 김포구’가 되면 지금 김포시가 직면한 문제들이 어떻게 해결된다는 것인지 무척 의문이다. 예컨대 가장 큰 현안인 김포골드라인의 ‘지옥철’ 문제는 ‘서울시 김포구’로 간판을 바꿔 달면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이러저러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설명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서울 편입의 근거로 주장했던 ‘출퇴근 인구 85%’라는 숫자도 잘못된 통계임이 금세 드러났다.
과학적 대응?
‘과학’ 강조했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일방 주장 검증 없이 받아들인 것부터 비과학적
윤석열 정부가 ‘과학’으로 가장 크게 기세를 올렸던 사안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였다. 일본이 오염수를 다핵종제거설비(ALPS)로 처리해 62개의 위험 핵종을 걸러냈고, 여기서 거르지 못한 삼중수소는 다량의 물로 희석시켰으니 안전에 별문제가 없다는 것이 ‘과학적’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과학적 방법론은 남의 말을 쉽게 믿지 않고 스스로 확인하는 데서 시작한다. 일본의 ALPS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그 성능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았다. ALPS로 한 번 처리한 오염수 속에 기준치 이상의 위험 핵종이 다량 포함돼 있었음은 일본 스스로가 인정한 사실이다. 이걸 여러 차례 처리한다고 해서 과연 원하는 수준으로 농도를 낮출 수 있는지 제3자가 객관적으로 검증한 적이 없다. 게다가 ALPS가 처리한다는 62종 이외의 다른 핵종이 얼마나 많이 오염수에 섞여 있고 그것이 해양생태계에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 이는 앞으로 연구해야 할 대상이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보고서에서도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다. IAEA 보고서는 대체로 일본 정부나 도쿄전력이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결과만 받아서 그것이 적정한지만 따지고 있다. IAEA라는 간판만으로는 그 보고서의 과학성이 확보되지 않는다.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데이터를 확보하고 어떻게 검증했는지가 객관적으로 재현 가능한 방식으로 제시되지 못했으면 과학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일본 관리들로부터 돈을 받고 보고서를 고쳤다는 의혹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어떤 물질을 얼마의 물로 희석시키면 농도가 어디까지 떨어진다는 것은 오염수를 둘러싼 여러 과학적 사실들 중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낮은 농도가 장기간에 걸친 해양생태계의 안전성을 자동적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건 또 다른 과학의 영역이다. 하나의 과학적 사실이 다른 모든 과학적 사실을 보증하지 못한다. 이는 과학자들도 가장 경계하는 일종의 지적 만용이다.
윤석열 정부의 반과학적 행보가 절정을 이룬 것은 내년 예산안에서 연구·개발(R&D) 항목을 전례 없는 수준으로 삭감한 사실이다. 삭감의 이유로 내세운 ‘이권 카르텔’이 무엇인지는 아직 명쾌하게 공개되지 않았다. 예산안이 삭감되는 과정 자체도 비민주적이고 비과학적이었다. 지난 3월까지는 R&D 예산을 예년과 비슷하게 총지출 대비 5% 정도로 유지하면서 2030년 과학기술 5대 강국으로 진입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가 불과 3개월여 만에 ‘카르텔’ 얘기가 나오면서 판을 뒤엎었다. 그 와중에도 정말로 용처가 불분명한 검찰 특활비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치가 없고 대통령 해외순방 예산은 늘었다고 하니 현장의 상대적인 박탈감이 클 수밖에 없다.
국가 차원에서 가장 큰 걱정은 윤석열 정부의 반과학적 행태 때문에 우리가 에너지전환이라는 시대적 과업에 너무 뒤떨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원전업계에 지나치게 경도된 반면, 상대적으로 태양광 같은 신재생에너지 분야는 환경오염과 비효율과 나눠먹기의 화신으로 매도하며 악마화하고 있다. 이는 지금 세계적인 에너지전환 추세에 완전히 역행하는 흐름이다. 한국은 글로벌 트렌드와 달리 태양광 발전단가가 원전보다 더 비싼 극히 드문 국가들 중 하나이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청정에너지 확보 순위에서 대만의 TSMC가 52위, 한국의 삼성전자가 234위에 올랐다. 3년 넘게 준비해 온 일회용품 사용제한 조치는 갑자기 중단되었다.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산업구조는 이미 새로운 무역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가속되는 기후위기 대응력도 떨어져 예기치 못한 재난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한반도의 평균기온 상승이나 해수온도 상승은 세계 평균을 크게 웃돈다.
미국은 인플레이션 감축법으로 수백조원의 천문학적인 돈을 에너지전환에 쏟아붓고 있다. 디지털전환에 가장 빠르게 성공해 선진국 반열에 겨우 발을 들여놓은 우리가 에너지전환에 실패한다면 다시 그 대열에서 탈락할 수 있다.
과학이 실종된 사회에 미래는 없다.
이종필 교수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90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으며 2001년 입자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연세대·고등과학원 등에서 연구원으로, 고려대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다. 2016년부터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신의 입자를 찾아서> <대통령을 위한 과학 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 <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 등이 있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등을 우리글로 옮겼다.
이종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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