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플레이션’에 낙농업 농가가 운다
한 달치 사료값만 3000만원
우크라 전쟁에 건초값 급등
전기료도 올라 월 350만원
정부, 우유 자급률 낮아지자
업체 쿼터 줄여 목장도 영향
협상 주도권 없는 농가는 ‘을’
지난 8일 오후 2시쯤 전남 영광군의 한 젖소 목장 축사에 들어서자 소들이 일제히 “음매” 하고 울었다. 귀에 ‘295’ 번호표가 붙은 암소는 누런 영광군산 보리 지푸라기를 우적우적 먹고 있었다. “우리 집 비법인데요, 보릿짚을 주면 우유에서 구수한 맛이 나요.” 4000평의 목장에서 젖소 35마리 등 소 80마리를 키우는 목장주 김용철씨(65)가 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목장은 평화로웠지만 김씨의 표정은 어두웠다. ‘밀크플레이션’(우윳값 인상이 빵, 아이스크림 등 다른 제품 가격까지 상승시키는 현상)으로 외국산 우유를 찾는 소비자들이 많아진 탓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럼피스킨병까지 퍼진 터다. 평소라면 ‘치즈·피자 만들기 체험’으로 북적일 시간이지만 럼피스킨병 감염을 막기 위해 11월에 예정된 체험 프로그램을 한 건 빼고 모두 취소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우유 소비자물가지수는 122.03으로 1년 전보다 14.3% 올랐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9년 8월(20.7%) 이후 14년2개월 만에 최대폭이다. 낙농진흥회는 지난달 1일부터 음용 원유 기본가격을 ℓ당 88원(8.8%) 올렸다. ‘낙농가의 생산비 인상’이 이유였다. 그러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낙농가가 폭리를 취했다”는 말이 나왔다. 수입 멸균우유를 사겠다는 소비자들도 나오고 있다.
■ 사료값 급등에 전기요금도 인상
김씨는 국내산 원유 생산비가 오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했다. 이날 축사 안 송아지들은 연둣빛 티머시 건초를 먹고 있었다. “얘네들한테 보릿짚은 아직 질겨서 이걸 먹여요.” 티머시 건초는 미국산이다.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발생한 ‘국제 물류 대란’ 여파로 가격이 급등했다. 김씨는 재작년까지 ㎏당 600원대이던 티머시 건초를 지난해부터 올봄까지 820원에 샀다. 최근에는 가격이 내려가 740원대라고 했다. 김씨는 “200만원어치 티머시를 사면 보름 만에 다 먹는다”고 했다.
젖소들은 수입 옥수수, 콩 등이 들어간 배합사료도 먹는다. 김씨의 젖소들이 먹는 사료는 재작년보다 ㎏당 70~80원 올랐다고 한다. 소 한 마리는 하루에 배합사료 15㎏ 정도를 먹는다. 김씨는 “건초와 배합사료를 합해 한 달 사료값이 3000만원”이라며 “사료값이 원유 생산비의 70% 정도”라고 했다.
오후 2시20분, 착유실로 이동했다. 소젖에서 짜낸 원유를 진공 컨트롤기를 거쳐 냉각기로 보내는 기계가 5평 남짓 공간을 가득 메웠다. 김씨는 아침에 두 시간, 저녁에 두 시간씩 매일 이곳에서 젖을 짠다.
김씨는 “전기요금이 올라 작년 이맘때 한 달에 200만원 청구된 전기요금이 요새는 350만원가량 나온다. 진공 컨트롤기, 선풍기, 보온등 등 전기 쓸 곳이 많다”며 “1980년대 낙농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수동 양동이 착유기를 썼는데, 지금은 이런 기계를 쓰면서 우유 품질이 훨씬 좋아졌다. 낙농은 장치산업”이라고 했다.
■ 외국산 시장 점령에 농가는 ‘을’
김씨는 1988년 송아지 두 마리로 낙농업을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낙농업은 농촌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일이었다.
착유 기계와 기술이 첨단화되면서 우유 품질은 좋아졌지만, 낙농업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김씨는 다자간 무역협정인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1994년 타결된 이후 낙농업 위기가 찾아왔다고 했다. 수입 원유의 국내 시장 점유율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해 우유 자급률은 44.8%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2003년 자급률은 79.1%였다.
김씨는 자급률이 낮아지면서 농식품부가 우유회사에 할당하는 쿼터가 줄고 있고, 이는 다시 우유회사가 각 목장에 할당하는 우유 판매 축소로 이어진다고 했다.
“쿼터가 줄어들 때마다 우리는 은행에서 빚을 내서 쿼터를 사야 이전 판매량을 유지해요. 우유 자급률이 높은 나라는 우유 생산을 많이 했다 적게 했다 하면서 유통사와 농가가 번갈아가며 협상 주도권을 갖는데, 우리는 농가가 계속 ‘을’이 되는 구조입니다.”
1997년 외환위기, 인구 감소 등도 낙농 산업이 내리막길을 걷게 된 요인이다. 김씨 역시 외환위기 당시 1만4000평의 목장을 모두 팔아야 할 상황에 처했지만 “그동안 쌓아온 기술을 물거품으로 만들 순 없다”며 4000평을 겨우 지켜냈다.
■ 낙농가 떠나는 현직자와 자녀들
경영난 탓에 목장 운영을 중도 포기하는 곳도 있다. 김씨는 “젊은이들이 낙농업에 들어올 길이 없다. 쿼터는 자꾸 삭감되고 마진율은 점점 줄어든다”며 “시설 투자하고 로봇 착유기를 샀는데, 후계하려던 자식이 낙농 앞날이 불투명하다고 도로 포기한 목장도 있다”고 했다.
지난해 한국낙농육우협회 조사 결과 ‘후계자도 없고 육성계획도 없다’고 답한 목장주 비율이 37.7%에 달했다. 전체 경영주의 56.5%는 60~70대다. 김씨네 목장은 딸이 이어 운영하기로 했지만 김씨는 “잘할지는 두고 봐야 한다”고 했다. 김씨는 말했다. “오전 5시부터 오후 9시까지 매일 일해야 해서 굉장히 힘든데, 마음 한구석 뿌듯함이 있어요. 낙농 상황이 어렵더라도 저희 목장만큼은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훌륭한 곳으로 남게 하고 싶어요.”
전문가들은 국내산 우유 소비가 줄어들면 낙농가 위기는 가속화할 것이라고 했다. ‘목장 수 축소와 투자비·인프라 축소→가격·질 경쟁력 하락→자급률 하락’의 악순환이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남명수 충남대 동물자원과학부 교수는 9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해서 들어오는 유제품은 관세가 면제되니 가격경쟁이 쉽지 않을 것”이라며 “국내 낙농산업 보호정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윤기은·정효진 기자 energy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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