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배·가압류 남용’ 진작 막았더라면…김주익은 죽지 않았다[‘노란봉투법’ 국회 통과]
쟁의에 7억여원 ‘돈줄’ 압박
고소·고발·구속·해고까지
노동자 벼랑으로 내몰아
“억울한 죽음 더는 없어야”
어린 김주익의 주변에는 친구들이 끊이지 않았다. 1970년대 초 강원 태백의 어느 마을, 김주익의 집 앞은 함께 공을 차자며 찾아온 동네 또래들로 매일 붐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82년 부산 한진중공업(현 HJ중공업)에 취업하고, 단칸방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 뒤로도 김주익은 매우 인기가 많았다. 동료들은 그를 노조위원장으로 뽑았다.
한진중공업이 구조조정의 칼날을 매섭게 휘두르던 때였다. 당기순이익이 늘었는데도 회사는 2002년 650명을 정리해고했다. 노동자들은 반발했다. 한진중공업은 노동자들의 쟁의행위로 손해를 봤다며 김주익과 간부들에게 7억4000만원의 손해배상·가압류를 걸었다.
‘돈줄’로 압박하는 한진중공업에 노동자들은 또 분노했다. 김주익은 2003년 6월 85호 크레인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동료들도 지상에 천막을 쳤다. 한진중공업은 파업 참가 노동자들을 150억원의 손배·가압류로 압박했다. 모두가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추석 즈음인 2003년 9월9일. 김주익은 크레인 위에서 유서를 쓰고 있었다. “잘못은 자신들이 저질러놓고 적반하장으로 우리들에게 손배·가압류에, 고소·고발에, 구속에, 해고까지 (한다)”라며 “우리가 패배한다면 어차피 나를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적었다. 김주익은 이어서 이렇게 썼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집사람과 아이들에게 무엇 하나 해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헤어지게 되어서 무어라 할 말이 없다. 아이들에게 힐리스인지 뭔지를 집에 가면 사주겠다고 크레인에 올라온 지 며칠 안 되어서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조차도 지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3일 뒤, 김주익의 둘째 딸(당시 10세)은 하늘 위로 편지를 보냈다. “크레인 위에 있는 아빠께. 아빠 그런데 내가 일자리 구해줄 테니까 그 일 그만하면 안 돼요? 그래야지 운동회, 학예회 울 아빠도 보잖아요.”
고공농성 129일째인 2003년 10월17일 김주익은 크레인 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후로도 수많은 노동자가 김주익처럼 기업으로부터 손배·가압류를 당하고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6개월치 월급을 모조리 압류당한 두산중공업의 배달호는 2003년, 고장난 수도꼭지를 고친 뒤 아내 앞으로 45만원이 든 봉투를 남기고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다. 쌍용자동차에서는 손배·가압류로 노동자와 그 가족 30명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쟁의행위를 이유로 한 무차별적인 손배·가압류를 제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지난해 10월 노동인권단체 직장갑질119가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79%는 ‘파업 등 노조의 파업으로 발생한 손실에 대해 파괴와 폭력을 동반하지 않은 경우 사측의 손해배상을 제한하는 법안(노조법 3조)’에 동의했다.
김주익이 숨진 지 20년이 지난 9일 노조법2·3조개정운동본부가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는 손배·가압류 피해 당사자들이 직접 나서 법안 통과를 촉구했다. 30억원의 손배소를 당한 김진아 민주노총 금속노조 KEC지회 수석부지회장은 “계획적으로 노조를 무력화하는 데 사용된 손배는 부당노동행위”라면서 “손배는 수많은 노동자들을 길거리에 내몰고 수많은 가정을 파괴했으며,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트라우마를 남겼다”고 했다.
노조법2·3조개정운동본부는 이날 김주익의 작은누나가 보낸 편지를 대신 읽었다.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손배·가압류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저는 지금도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뉴스만 보면 텔레비전을 끄고 나갑니다. 올해로 꼬박 20년이 됐는데도, 어제 일처럼 눈물이 계속 흐릅니다. 제발 우리 주익이 같은 억울한 죽음이 다시는 없도록 이번에 국회에서 법이 잘 통과됐으면 좋겠습니다.”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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