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급박한 위험 근거 있으면 노동자에 ‘작업중지권리’ 있다”
사측, ‘무단 이탈’ 정직 2개월
원심은 “정당한 징계” 판단
6년8개월 만에 “무효” 확정
인근 공장에서 화학물질 누출사고가 나자 노동자들을 대피시킨 노동조합 지회장에게 회사가 징계를 내린 것은 부당하다고 대법원이 판단했다. 작업중지권 행사 기준이 지나치게 까다로워선 안 된다는 취지다. 산업재해 예방을 위한 노동자의 작업중지권 행사 기준을 폭넓게 해석한 것이다.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A씨가 회사를 상대로 낸 정직처분 무효소송 상고심에서 A씨 패소인 원심 판결을 9일 파기하고 사건을 대전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세종시 산업단지 내 한 회사의 노동조합 지회장인 A씨는 2016년 7월 200m가량 떨어진 공장에서 화학물질인 티오비스가 누출되는 사고가 발생하자 조합원들에게 작업을 중단하고 대피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회사는 A씨의 대피가 작업장 무단 이탈이라며 정직 2개월의 징계처분을 했다. A씨는 징계에 불복해 2017년 3월 소송을 냈다.
쟁점은 A씨의 대피 지시가 산업안전보건법이 규정하는 ‘작업중지권’의 정당한 행사에 해당하는지 여부였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 근로자는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다’며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을 보장한다.
원심 재판부는 사측의 징계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A씨가 작업중지권을 행사할 만한 급박한 위험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고 지점으로부터 반경 10m 이상 거리에서 황화수소가 검출되지 않은 점, A씨 회사는 위험성이 높지 않아 소방본부가 대피방송을 하지 않은 점 등이 근거였다. 작업중지권 행사의 요건, 급박한 위험의 판단기준을 좁게 해석한 것이다.
대법원은 원심이 잘못됐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작업중지권에 대해 “산재를 예방하고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근로자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규정”이라며 “(노동자는) 업무에 관계되는 건설물·설비·원재료·가스·증기·분진 등에 의하거나 작업으로 인해 사망·부상 등의 급박한 위험이 있다고 믿을 만한 합리적인 근거가 있으면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급박한 위험도 있었다고 봤다. 황화수소는 독성이 강한 기체이고 사고 지점으로부터 반경 1㎞ 내의 주민들에 대해서는 대피방송이 이뤄진 점 등을 보면 상당한 거리까지 화학물질이 퍼져나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고 했다.
대법원은 “A씨는 회사의 근로자이자 노동조합의 대표자로서 인체에 유해한 화학물질이 누출됐고, 이미 대피명령을 했다는 소방본부 설명과 대피를 권유하는 근로감독관 발언을 토대로 산재 발생의 급박한 위험이 존재한다고 인식하고 다른 근로자들에게 대피를 권유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금속노조는 성명을 내고 “늦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대법원이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노동자의 권리를 확인시켰다”며 “이번 판결로 이제는 더 이상 노동자들이 위험과 죽음으로 내몰리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민주노총은 “정부에 위험작업 작업중지권 실질 보장을 위한 제도 개선을 수차례 제기했지만 아무런 답변이 없다”며 “위험작업 작업중지권 실질 보장을 위해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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