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익 칼럼] 노년의 책 읽기

한겨레 2023. 11. 9.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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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익 칼럼]김치수 말마따나 ‘정년이 없는 글쓰기’의 시간만은 유예하고 싶어 자습으로 컴퓨터 글치기를 익히며 잡문이 섞인 문학비평도 쓰고 신문 칼럼도 기고하는 등 글쟁이의 짓거리는 계속했다. 그것이 ‘짓거리’일 것이, 내 글쓰기가 멋대로의 자유로움을 누린 때문이고 그 자유로움은 노년의 책임 없는 책읽기로 가능했다.

김병익 | 문학평론가

복거일이 기증한 그의 다섯권짜리 장편소설 ‘물로 씌어진 이름’을 보기 시작하다가 내 정신은 그 주인공 이승만으로부터 엉뚱하게 내 소년기의 옛 시절로 빠졌다. 이 소설의 처음이 내 출생 시기와 비슷한 탓이었으리라. 초등학교 입학하는데 어쩌면 시험 볼지 모른다고 갓 중학생이 된 형이 내 일본어 이름과 학교 이름을 한자로 가르쳐주어 그걸 익히던 일이 회상된 것이다. 그리고 열살 때던가, 누이가 빌려온 소설책에서 재미난 중간제목이 눈에 띄어 보기 시작해, 그 끝을 먼저 본 뒤 앞으로 돌아가 다 본 것이 내 성인도서의 첫 읽기였다. 저자며 책 이름은 당연히 잊어버렸지만 당시 유행하던 이른바 ‘대중소설’이었고 내 책읽기가 거기서 시작했기에, 그 후 청소년들이 어떤 책이든 읽기만 한다면, 아이들이 재미만 찾아 혹은 연애소설 같은 책을 본다고 걱정하는 어른들의 핀잔에 동조하지 않았다.

사회인이 되어 신문사 문화부에서 일하면서 문학과 학술, 출판을 담당한 때문에 나는 책을 피할 수 없었다. 어떤 건 건성으로 차례와 서문으로도 대강 짐작하며 읽은 척하면서 내가 아는 책들은 더 늘어났다. 신문사에서 물러나 시작한 작업이 출판업이었기에 만들고 얻고 산 책들이 높이 쌓여갔다. 마침 1980년대, 한 전문대 도서관이 받아들이겠다고 해서 아끼는 책을 보관한 책장 하나만 빼고 제목도 보지 않은 채 모두 넘겨주었는데 7천권, 한 트럭분이었다. 그리고 23년 전 신도시로 이사할 때 이 비슷한 책 정리를 한번 더 치렀다. 내가 사고 얻은 책들은 물론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값싼 일반 서점 도서들이어서 그리 아쉬울 것도 없었다.

그래도 아까워한 적도 있었다. 해방을 맞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중1이었던 형이 내게 넘겨준 것 가운데 가장 귀중한 것이 잡지 ‘소학생’이었다. 타블로이드판 주간이었다가 곧 4×6배판 어린이 월간지가 된 이 잡지를 나중에 창간된 ‘소년’과 함께 나는 열심히 구입해 보고 차곡차곡 모아두었다. 6학년, 6·25 피란에서 돌아와 그 잡지들이 불탄 것을 보고 2층 우리집이 사라진 것보다 더 섭섭해했다. 그 발행사 이름에 든 ‘을유’가 무슨 뜻인지 내내 궁금해하다가 한참 후 해방된 해인 1945년 을유년에서 따왔음을 알게 된 내 어리석음을 훗날 정진숙 을유문화사 회장님께 고백해 반가운 웃음을 산 적이 있다. 중학교에 진학해 이번에는 ‘학원’을 보고 모으는 재미가 유달랐는데, 이제하, 유경환을 비롯한 소년 문사 작품들을 지방의 어린 눈으로 무척 부럽게 바라보았다.

10년 동안 일간지 문화부 기자 노릇을 하며 최인훈 홍성원에서 최인호에 이르기까지의 소설가와 황동규 마종기 김영태 등 시인들과 어울리며 평론가 김현의 제의로 김치수 김주연 등 대학으로는 후배이지만 문학으로는 선배인 친구들과 어울리며 계간 ‘문학과지성’을 간행하던 때의 보람은 당연히 유다른 것이었다. 우리보다 몇해 앞서 계간지를 만든 백낙청 염무웅의 ‘창작과비평’과 달리 이른바 순수문학을 지향했기에 우리는 ‘창비’와 다른 ‘문지’의 문인 블록을 이룰 수 있었다. 때마침 문학의 참여/순수, 리얼리즘/모더니즘으로 맞서 논쟁이 일던 참이어서 두 잡지는 문학의 존재이유와 그 창작방법론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벌이게 되는 참이었다.

이즘에 접해야 할 책과 글들은 왜 그리 까다롭고 어려웠는지. 그러면서 내 젊은 시절, 중년 시절은 시대의 어려움을 함께 겪으며 유신과 민주화 과정을 헤쳐 나가야 했다. 그러면서 25년, 서기 2000년이 되는 해, 나는 새로운 세기야말로 문화에서 문명으로 넘어가 디지털 세대의 것으로 접수될 것으로 판단하고 우리 아날로그 세대는 뒷전으로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하며 출판사와 잡지 일들을 후배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나는 ‘자유 지식인’ 생활로 들어갔다.

문단의 현장에서 물러나고 지식사회의 변두리에서 서성거리면서도 김치수 말마따나 ‘정년이 없는 글쓰기’의 시간만은 유예하고 싶어 자습으로 컴퓨터 글치기를 익히며 잡문이 섞인 문학비평도 쓰고 신문 칼럼도 기고하는 등 글쟁이의 짓거리는 계속했다. 그것이 ‘짓거리’일 것이, 내 글쓰기가 멋대로의 자유로움을 누린 때문이고 그 자유로움은 노년의 책임 없는 책읽기로 가능했다. 내게 온 청탁이 까다로운 원전의 인용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체계적인 논리를 짜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저 읽고 거기에 얽힌 생각을 늘리거나 기억을 이어 얽으면 편집자들은 노인의 글이니, 하고 허용해주는 듯했다. 나는 이 방만한 작문을 좋은 말로 ‘자유로운 글쓰기’라고 하는데 그것은 이 ‘멋대로의 책읽기’ 덕분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 덕에, 명색 ‘문학평론가’였지만 실제는 잡문가였고 내 책읽기는 카뮈와 도스토옙스키 전집을 몰아 읽거나 황순원부터 최인호로, 식민시대사에서 현대과학사로 그리고 그 과학자들의 스릴 넘치는 탐구의 과정들을 제멋대로 덤벙거리는 잡독이었다. 그 잡독이 나이 들수록 과학과 과학사 이야기로 모이는 것이 스스로도 흥미롭다. 이해도, 설명도 할 수 없는, 더구나 현대과학의 정밀한 논리와 체계를 짐작도 못 하면서 그런 유의 책에 매달리고 있는 내 늙마의 취향에 대해서는 ‘모르니까 당긴다’는 호기심 많은 청소년기의 연애 심리로 설명될 수 있을까.

나이는 목에 차고 능력은 발등으로 내려앉아 의욕이 바닥난 이제, 새삼 무슨 엄두를 낼 것인가. 그래, 드디어 ‘물로 씌어진’ 내 이름의 작고 여린 몸에 어울리게 처신할 단계에 이르러 조용히 뒤칸 허물 감출 자리로 옮겨야 할 것이었다. 새로운 세기의 새로운 세상이 펼치는 새로운 모양들을 구경하며 조용히 순명하는 것, 그 뜻과 형상을 이해 못 하는 대로 바라보고 눈으로나마 챙기는 것, 그것이 이제의 내 책장 앞에 차려진 그래도 음전한 자리이겠다 싶어진다. 생애는 짧고 사연은 어설픈데 마음은 한스럽고 몸은 허술하다. 늙고 낡은 정신에 다가오는 책들을 만지작거리며 겉핥기로 얻고 속내 없이 잊어버리고 마는 속절없는 내 80대의 독서는 이 노쇠의 자리에서 뒹구는 시간과 함께 헛된 망령으로 흐르고 있음을 깨닫는다. 결국 이 나이의 내게 책이 줄 것이란 허망의 소회로 그칠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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