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글살이] 몰래 요동치는 말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아무래도 나는 좀스럽고 쪼잔하다.
겉모습은 그대로인데 속에선 요동치는 말에 관심 가지는 정도.
이를테면, '연필을 깎다'와 '사과를 깎다'에 쓰인 '깎다'는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하는 정도.
'깎다'라는 말은 관념 속에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말글살이]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아무래도 나는 좀스럽고 쪼잔하다. 하는 공부도 장쾌하지 못하여 ‘단어’에 머물러 있다. 새로 만들어진 말에도 별 관심이 없다. 겉모습은 그대로인데 속에선 요동치는 말에 관심 가지는 정도. 이를테면, ‘연필을 깎다’와 ‘사과를 깎다’에 쓰인 ‘깎다’는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하는 정도. 뜻이 한발짝 옆으로 옮아간 ‘물건값을 깎다’도 아니고, 그저 ‘연필’과 ‘사과’에 쓰인 ‘깎다’ 정도.
연필 깎는 칼과 사과 깎는 칼은 다르다. 연필 깎는 칼은 네모나고 손가락 길이 정도인 데다가 직사각형이다. 과일 깎는 칼은 끝이 뾰족하고 손을 폈을 때의 길이 정도이다. 연필은 바깥쪽으로 칼질하지만, 사과는 안쪽으로 해야 한다.
연필은 집게손가락 첫째 마디 위에 연필 끝을 올려놓고 반대편 손 엄지손가락으로 칼등을 밀어내며 깎는다. 사과는 손바닥으로 사과를 움켜쥐고 반대편 손은 사과 표면에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넓게 벌렸다가 집게손가락에 닿아 있는 칼등을 엄지손가락이 있는 데까지 끌어당기면서 깎는다. 둘은 다르다고 해야겠군!
그래도 깎는 건 깎는 거니까 같다고? 좋다. 그러면 둘 다 같은 칼로, 같은 방향으로 깎는다고 치자. 그러면, 둘은 같은가? 행위에는 목적이나 결과가 있다. 연필을 깎으면 글을 쓰지만, 사과를 깎으면 먹는다. 두 동작(작동)의 목표와 결과는 다르다.
‘깎다’라는 말은 관념 속에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사물과 연결된 미세한 행동방식과 함께 몸에 새겨져 있다. 우리는 이 세계를 온 감각을 동원하여 지각하며 이해하며 행위한다. 말은 말 홀로 머물러 있지 않고, 외부 환경에 조응하는 몸의 감각과 함께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것만으로 족하다. 좀스럽긴 하지만.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노란봉투법’ 국회 본회의 통과
- 서울지하철 ‘경고 파업’에 2·3·5호선 비상대기열차 투입
- 흙 밖으로 나온 사지뼈, 발치엔 뒤집힌 고무신…73년 전 동막골엔
- “배고파 음식 쓰레기 뒤져” 93살 할머니, 14살 강제동원을 말하다
- 58억 부당이득 혐의 ‘슈퍼개미 유튜버’ 무죄…“정당하다는 건 아냐”
- [단독] ‘로또 아파트’ 미계약 1채, 그룹 실세 사장에 넘긴 현대건설
- 민주, 이동관 탄핵소추안 발의…손준성·이정섭 검사도 탄핵키로
- 홍준표·김태흠도 반대하는 ‘김포 서울 편입’ 김영환 “난 찬성” 왜?
- 아파트 화재 ‘무조건 대피’가 사상자 키웠다…소방청 지침 변경
- 코로나 방역 모범국에 ‘빈대 팬데믹’ 공포…한국 대책에 쏠린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