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외교' 하겠다던 윤석열 정부, 가장 중요한 '가치'는 '미국의 뜻'?
[이재호 기자(jh1128@pressian.com)]
한미 외교장관이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은 "규탄"하면서, 1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어떠한 비판도 하지 않았다. 러시아와 이스라엘을 대하는 미국의 '이중 기준'에 대해 유럽을 비롯한 국제사회 곳곳에서 비판이 나오고 있는 데도 한국은 사실상 미국 정부의 입장을 따라가기만 하고 있는 셈이다.
9일 박진 외교부 장관은 서울 도렴동 정부서울청사에서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 외교장관 회담을 가진 이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에 대해 가해진 무차별적인 공격을 규탄한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 10월 7일(현지시각) 하마스가 이스라엘의 남부를 습격해 1400명 이상이 사망한 데 따른 반응이다.
그런데 박 장관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사망자가 1만 명이 넘은 현 시점에서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규탄이나 유감 표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무력 충돌로 인해서 민간인 사상자가 급증하고 있는 데 대해서도 깊은 우려를 표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그러면서 박 장관은 "당사자들이 국제인도법을 준수하며, 민간인 보호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한다"며 "미국 시민을 포함한 모든 인질들이 조속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밝혔다.
박 장관은 양측 간 휴전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인도적 목적의 일시 교전 중단이 필요하다는 점도 재확인했다"며 미국의 기존 입장을 그대로 밝혔다. 그러면서 박 장관은 "중동 정세 안정화와 인도주의적 위기 해소를 위한 블링컨 장관의 적극적인 외교적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블링컨 장관의 중동 순방 이후 상황이 달라진 것은 별로 없는 상태다. 오히려 블링컨 장관이나 미국이 아닌 카타르가 중동 지역 정세 안정을 위해 적극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AFP>통신은 8일(현지시각) 익명을 요구한 소식통을 인용, 카타르가 미국과 조율을 통해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협상을 중재하고 있다며 "3일간 인도적 교전 중단과 절반이 미국인인 12명의 인질 석방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국 정부는 앞서 지난 10월 27일(현지시각) 유엔총회에서 요르단이 작성한 휴전 촉구 결의안에 기권표를 던지기도 했다. 해당 결의안에 하마스 공격에 대한 규탄이 포함돼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 였다. 미국은 이 결의안에 반대했다.
하지만 이 결의안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이집트, 튀르키예 등 아랍권의 주요 국가들과 중국, 러시아, 베트남, 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들, 프랑스와 스페인 등 서방 국가들이 찬성표를 던지면서 찬성 120표, 반대 14표, 기권 45표로 채택됐다.
한국 정부가 국제사회의 여론이나 국제법 준수 등의 '글로벌 스탠더드'보다는 미국의 뜻을 더 중시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 대목이었다. 윤석열 정부가 '가치 외교'를 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실제 민주주의나 인권, 생명 등의 가치보다는 미국이 원하는 바에 집중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한편 블링컨 장관의 방한에 맞춰 90여 개 시민사회단체가 함께하고 있는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 시민사회 긴급행동'은 9일 정부서울청사 인근에서 '미국은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지원 중단하라! Stop Funding Genocide!' 라는 제목으로 항의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다. 10월 7일 이후 지금까지 사망자만 1만 명이 넘었으며, 그중 75%가 아동과 여성, 노인"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봉쇄로 전력, 연료, 식량, 물, 의약품 등 모든 것이 심각하게 부족한 상황이고, 가자 지구 병원의 절반이 폐쇄됐으며 남은 병원들 역시 몰려드는 부상자로 붕괴 직전이다.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제노사이드(집단학살)이 벌어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들은 "미국은 유엔 안보리와 총회의 '즉각 휴전' 결의들을 모두 반대했다. 한편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폭격에 사용되는 정밀유도폭탄, 155mm 포탄 등의 각종 무기 판매를 승인하거나 지원하고 있다. 140억 달러의 군사 원조 예산도 현재 미국 의회에서 논의되고 있다"며 미국의 이같은 지원은 "팔레스타인 점령과 봉쇄, 민간인 학살에 사용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재호 기자(jh1128@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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