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5.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경기일보 2023. 11. 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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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했던 왕실사찰… 바람처럼 사라지다
양주시 회암동 천보산 자락에 위치한 조선시대 최대의 왕실사찰인 회암사는 현재 터만 남아 262칸에 이르렀던 당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회암사지 전경. 윤원규기자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노여움도 내려놓고 아쉬움도 내려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이 유명한 시를 지은 이는 나옹 선사(1320~76)이다. 고려는 물론 중국에서도 명성이 높았던 나옹 선사가 득도한 곳이 양주시 천보산 자락에 자리한 회암사다. 나옹은 고려 말의 개혁 군주 공민왕의 스승이자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왕사인 무학 대사의 스승이기도 하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1335~1408)는 무학 대사가 주지로 있는 회암사에 자주 행차했는데 1398년 상왕으로 물러난 후 회암사에 궁실을 짓고 머무르며 수행하기도 했다. 왕실사찰인 회암사는 세종의 작은 형 효령대군을 비롯해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수렴청정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문정왕후 등 왕실의 후원으로 번영을 누린다. 그러나 회암사가 언제 설립되고 언제 폐사됐는지조차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12세기 건립되고 16세기 말 어느 시기 유생들의 방화로 폐사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1964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회암사지를 1997년부터 2019년까지 13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벌였다.

양주시 율정동에 위치한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은 유물의 수집·보관·연구·전시·교육을 위해 2012년 개관, 운영되고 있다. 박물관 전경. 윤원규기자

■ 고려 말 조선 초 최고의 왕실사찰 회암사의 위상

최석현 학예연구사의 안내를 받아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양주시장 강수현) 상설전시실을 둘러본다. 왕을 상징하는 용무늬 그림을 배경으로 기록해 놓은 회암사의 역사가 흥미롭다. 회암사를 조선 최고의 사찰로 만든 지공 선사, 나옹 선사, 무학 대사의 초상을 만난다. 우리 역사를 풍부하게 기록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회암사를 어떻게 소개할까.

“회암사는 천보산에 있다. 고려 때 서역의 중 지공이 여기에 와서 말하기를 ‘산수형세가 완연히 천축국 나란타사원과 같다’고 했다. 그 뒤 중 나옹이 절을 세우기 시작했으나 마치지 못하고 죽었고, 그 제자 각전 등이 공역을 마쳤다. 절이 무릇 262칸인데 건물과 상설이 굉장하고 아름다워 동방에서 으뜸으로 중국에서도 많이 볼 수 없는 정도다. 목은이 기문을 지었다.” 태종실록의 기록은 더욱 흥미롭다. “태상왕이 소요산에서 회암사로 행차했다. 태상왕이 회암사를 중수하고 또 궁실을 지어 머물러 살려고 하니 임금이 그 뜻을 어기기 어려워 대부 150명을 보내 부역하게 했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 이성계가 회암사를 일곱 번 방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모형으로 회암사를 찾는 태조 이성계의 행차 장면을 보여준다. 발굴한 유물이 생각보다 풍성하다. 지붕에 올라가는 장식기와 잡상이 놀랍게도 갑주를 입고 앞을 노려보는 무장 형상이다. 회암사지에서 발굴한 잡상은 삼장 법사, 손오공 등 ‘서유기’의 등장인물이 아니라 갑옷을 입은 무장형과 인간과 동물의 모습이 혼합된 반인반수형, 말이나 새 등의 동물을 표현한 동물형이다.

양주시의 승격 20주년을 기념해 기획전시실에서 진행중인 ‘양주 사람, 양주 이야기’ 전시실 모습. 윤원규기자

전시실 중앙에 전시된 청동금탁은 어떤 사연을 품고 있을까. 보광전 처마에 매달려 청아한 소리로 승려들의 마음을 씻어줬을 청동금탁은 높이 31.7㎝, 지름이 30.7㎝나 되는 초대형인데 몸체 상단에 15자, 하단에 134자가 새겨져 있다. 금탁에 새긴 소원이 갸륵하다. “우리가 이 신묘하고 아름다운 연기를 받들어 조선의 국호가 만세에 전해지도록 하소서. 전쟁이 영원히 그쳐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고 마침내 같은 인연의 깨달음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정교하게 조각된 대형의 용두와 토수에서도 왕실사찰의 위엄과 품격이 느껴진다. 커다란 송곳니를 드러내고 목을 뒤로 젖힌 용은 지붕 처마 끝자락을 하늘로 들어올릴 듯 힘과 기상이 넘친다. 범어가 새겨진 수막새 한 점이 눈에 들어온다. 1434년 세종의 작은 형 효령대군이 제작한 ‘효령대군 선덕갑인’은 회암사의 역사와 위상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온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고고함이 느껴지는 최상급 자기의 바닥에 새겨진 천, 지, 현, 황 순의 글자가 이채롭다. 파란빛의 청기와는 청동금탁 못지않게 희귀한 유물이다. “청기와를 제작하려면 화약의 원료인 염초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신하들은 비용이 많이 드는 청기와의 사용을 강력하게 반대했지요.” 영상으로 만나는 ‘회암사 대가람’이 압권이다. 고려 말, 조선 초 최대의 왕실사찰 회암사 대가람을 복원모형 및 영상으로 각 건물의 역할과 생활상을 실감 나게 보여준다. 모란과 국화 문양을 새긴 향로 향완이 우아한 자태를 자랑한다. “청동으로 제작된 향완은 많으나 분청사기로 제작된 것은 이것이 유일합니다.”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석조 불상. 윤원규기자

■ 양주 사람, 양주 이야기

박물관 2층에 마련된 ‘360° 다면실감’은 양주 화암사지의 역사적 의미를 4면의 벽과 천장과 바닥까지 6면의 미디어아트로 황홀하게 표현한다.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특별전시 ‘양주 사람, 양주 이야기’는 어떤 내용일까. “양주시 승격 20주년을 기념해 시의 유일한 공립박물관인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에서 그간의 역사를 돌아보는 내용으로 마련한 전시입니다. 2003년 시로 승격한 이후 현재 인구 26만의 도시로 성장했지요. 가장 성황을 이뤘던 조선시대 양주목에서부터 근현대기 양주군까지의 내용을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전시된 여러 종류의 고지도 중 ‘조선팔도지도’는 옛 양주지역의 광활한 영역을 잘 보여준다. 조선 양주목의 기능을 확인할 수 있는 조선왕릉 및 양주목사 관련 유물도 눈에 들어온다. 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조소앙 선생의 3·1절 기념사가 가슴을 울린다. “우리 조국을 광복하오리다. 만일 그렇지 못하게 되면 나의 몸을 불에 태워 죽여주시오.” 양주는 600여년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서 깊은 문화의 고장으로 양주별산대놀이를 비롯한 유·무형의 중요한 문화재를 여럿 간직하고 있다. 양주시의 위상과 미래 발전의 가능성을 전망할 수 있는 이번 전시는 내년 2월까지 운영된다.

6면의 실감전시실에서 미디어아트 ‘회암사-빛으로 살아나다’를 감상할 수 있다. 윤원규기자

박물관 입구에 전통놀이 문화공간 ‘우리놀이터 양주’가 있다. 노란색 벽에 옛날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공기, 고누, 팽이가 전시돼 있다. 11월18~19일 이틀 동안 이곳에서 진행할 전통생활문화교육 프로그램이 주목된다. ‘쿵떡쿵떡 놀이학당’은 어린이들이 여러 가지 전통놀이와 전통생활문화를 체험하면서 배려와 존중, 소통, 협력의 가치 등을 배우고 세대 간 공감대를 형성하게 하는 교육 활동이다. 지난해 설치된 전통놀이 문화공간 우리놀이터 양주는 관람객 누구나 무료로 다양한 교구재를 통해 전통놀이를 체험할 수 있다. 현재 ‘2023, 주말 교육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회암사지 출토유물을 주제로 어린이 역사탐험대, 모의 발굴체험, 얌얌 쿠킹클래스, 왕실 백자공작소, 역사꿈틀 자연꿈틀, 전래놀이 등 6종의 주말 교육프로그램이다. 올해 새롭게 개설한 ‘어린이 역사탐험대’는 회암사지 유적이 지닌 역사적 배경과 지역 문화유산 및 교과단원 연계를 통해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높이는 프로그램이다.

건물의 내림마루나 추녀마루 위에 놓이는 장식기와인 동물모양 잡상. 윤원규기자

■ 회암사지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양주시는 2015년부터 7년간 학술연구를 통해 지난해 7월20일 양주 회암사지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라는 성과를 이뤄냈다. 양주시는 올해 1월 세계유산 등재 추진을 전담할 세계유산추진팀을 신설하고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사업을 본격 추진하고 있다. 박물관 광장에 세계유산 홍보관을 마련해 관람객들이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수도를 설치하고 회암사지 안내책자의 비치와 홍보 영상을 상영하고 있다. 최석현 학예연구사가 회암사지가 세계유산에 등재될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들려준다. “양주 회암사지 유적은 14세기 동아시아에 만개했던 불교 선종문화의 번영과 확산을 증명하는 탁월한 물적 증거입니다. 불교 선종의 수행 전통, 사원의 공간 구성 체계를 구체적으로 증명하는 고고 유산이지요.”

박물관을 나와 숱한 사연을 간직한 유물이 쏟아져 나온 회암사지를 둘러본다. 나옹이 노래한 청산은 천보산이 아닐까? 천보산 너른 품에 안긴 회암사지를 답사하며 다시 나옹의 시를 읊조려 본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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