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년 만에 오대산으로 돌아온 조선왕조실록…월정사 노력 결실
‘조선왕조 472년 역사를 담은 기록들이 다시는 제자리를 떠나 떠돌게 하지 않겠습니다.’
후대인들의 절실한 마음이 선조들의 절실했던 마음과 만나 큰 결실을 이루었다. 전시장에는 붉은 글자와 선, 점을 치며 역사기록의 오류와 실수를 뜯어고친 흔적이 역력한 조선왕조실록의 교정본 유물들이 등장했다. 고종의 황제 등극을 알리는 큰 의식의 기록들이 이어지고 불탄 철종 임금의 초상화 밑에 생생한 그의 장례 기록물이 놓인 모습들 속에서 기록하려는 의지와 이를 보존하려는 의지들을 느끼면서 역사의 힘과 무상함을 함께 떠올리게 했다.
지난 세기 초 일본에 무단반출됐다가 2000년대 초 환수된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이 마침내 원래 보관처인 강원도 오대산의 품으로 돌아오면서 펼쳐진 풍경들이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이 오는 11일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월정사 경역 들머리에서 문을 열면서 오대산 본의 실물들이 국민들과 바로 만나게 됐다. 오대산 사고부터가 왜적의 침략전쟁인 임진왜란 이후 실록을 안전하게 지키려는 의도로 지어진 시설이니 역사기록을 지키려는 과거와 현재의 뜻깊은 만남이기도 하다.
16세기 임진왜란 이후 국가 사서의 안전한 보전을 위해 강원도 오대산사고에 200여년간 보관해온 조선왕조실록과 국가 왕실 행사의 진행과정을 기록한 공적 문서집인 의궤는 당대 기록유산의 정수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실록 전량과 의궤 일부가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불교계, 정부의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2006년과 2017년에 실록이, 2011년에 의궤가 각각 국내로 환수됐다. 현재 오대산사고본 실록은 75책, 환수된 의궤는 82책이 전해진다.
문화재청은 환수 뒤 국가 유산임을 들어 고궁박물관에 실록을 보관해왔으나 원래 사고가 있던 오대산에 보관해야 한다는 월정사 쪽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결국 절 입구에 따로 실록관을 개설하게 됐다. 유물 환수운동에 처음부터 진력해 결국 도쿄대의 환수 조치를 이끌어낸 주역인 월정사 쪽의 진정성있는 활동이 인정받은 것이다. 문화재청은 2년 전 월정사 경역에 국가실록박물관을 설치하는 것으로 확정하고 각종 후속 시설 보완을 진행한 끝에 올가을 마침내 사고본의 귀환이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새 박물관은 일본에서 환수된 이래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해 온 오대산 사고본 실록 75책과 의궤 82책을 포함해 관련 유물 1207점을 보관·관리한다. 아울러 상설 전시를 통해 오대산 사고에 보관해 온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들을 지속적으로 교체하면서 소개하게 된다. 원래 왕조실록은 공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항상 실록 원본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전시기관이 생겼다는 의미가 적지않다.
11일 개관에 앞서 9일 언론에 사전 공개된 새 박물관 안에서 오대산사고본에 들어있는 실록과 의궤의 다채로운 면모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전시장은 월정사 쪽이 건립한 실록 영인본 전시관을 부분 리모델링한 얼개다. 들머리 그래픽 영상부터 만듦새가 색다르다. 임진왜란 직후 들어선 오대산 사고의 시작부터 구한말 일제의 약탈에 가까운 강탈 과정과 이후 일본 궁내청과 도쿄대로 분산·소장되는 수난사, 그리고 2000년대 이후 월정사를 중심으로 한 실록 제자리찾기 운동의 성과들까지 충실하게 요점을 집약시켜 보여준다.
기획전시실과 수장고 리모델링 공사는 마무리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선 개관한 공간은 상설전시실에 한정되지만, 전시가 세 부분으로 짜임새 있게 구성돼 다채로운 실록과 의궤의 면모와 쓰임새를 조망할 수 있다.
1부는 오대산사고에 보관했던 실록과 의궤의 편찬과 보관 과정부터 일제강점기인 1913년에 반출된 후 110년 만에 오대산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살펴보는 부분이다. 외사고 전각에 걸었던 ‘실록각’(實錄閣)·‘선원보각’(璿源譜閣) 현판 등을 선보이면서 실록 오대산본을 강화사고본, 태백산 사고본 등 다른 사고본 실록들과 비교 전시한 대목이 눈에 띈다.
2부는 472년간의 실록의 편찬과정을 오대산사고본 성종실록, 중종실록, 선조실록, 효종실록 실물과 함께 살펴보는 전시의 고갱이 중 하나다. 붉은 선으로 칠한 교정쇄본이 유일하게 들어간 성종실록과 중종실록 기록들을 다른 사고본의 정본과 함께 전시해 오대산본의 독특한 특징을 살펴볼 수 있게 하고, 실록편찬의 중간 과정과 교정부호 체계도 확인할 수 있다.
3부는 태조, 고종, 철종 세 임금의 삶을 담은 의궤와 실록을 선보이는 장인데, 세 임금의 초상과 어보(도장) 실물이 함께 나와 입체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19세기 태조의 어진 제작과정을 담은 의궤 기록과 어진 복원본을 필두로,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제에 등극한 의식을 기록한 의궤와 붉은 옷을 입은 그의 초상, 용이 여의주를 문 황제지보 인장과 이 어보를 그린 의궤의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강화도령’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철종의 진열장도 주목되는데, 반쯤 불탄 군복 어진과 장례 절차를 기록하고 관의 모양새를 그린 의궤 기록들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조선의 군주로서 겪은 삶의 순간들을 기록한 실록과 의궤의 내용을 그림과 인장이 뒷받침해주는 셈이다.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과 도쿄제국대학의 소장인이 크게 찍힌 의궤의 표지 모습들이 전시된 말미 부분도 정처없이 타향살이를 해야했던 오대사본 실록과 의궤의 수난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지나칠 수 없다.
새 박물관에 오대산사고본 실록과 의궤가 모두 돌아온 것은 아니다. 아직 수장고 리모델링이 끝나지 않아 전시실에는 실록 9점과 의궤 26점만 들어와 선보이는 중이다. 개관 실무를 맡은 박수희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내년 하반기까지 리모델링을 마무리되는대로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오대산사고본을 모두 이관하고 서울대 규장각 등 다른 기관에 소장된 다른 사고의 실록과 의궤들도 전시하는 방안을 장기적으로 추진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개관식 하루 전인 10일에는 실록과 의궤를 오대산으로 옮기는 이운행렬 재연행사와 축하 공연이 마련되며 11일 오후 2시 열리는 개관식에는 고유제 등 기념행사가 펼쳐진다. 일반 관람은 12일부터 가능하다.
평창/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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