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도, 식량도, 생명도 없어”···가자 북부 수만명 ‘남쪽으로’
8일(현지시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북부와 남부를 연결하는 살라알딘 도로에는 폐허가 된 도시를 빠져나온 인파로 긴 행렬이 이어졌다. 지친 표정이 역력한 사람들은 대부분 간단한 소지품만 지녔고, 일부는 여권과 신분증을 높이 들어올린 채 하염없이 걸었다. 걸을 수 없는 환자들은 휠체어나 수레에 실렸다. 이스라엘군의 탱크나 장갑차를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양팔을 머리 위로 올리거나 흰색 셔츠, 베갯잇, 식탁보 등으로 ‘급조’한 백기를 들었다.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근거지’로 지목한 북부 도시 가자시티를 포위하고 지상전을 본격화하면서 폐허가 된 북부 지역을 떠나는 민간인들의 피란 행렬이 이날로 닷새째 이어졌다.
이날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 남부로 향하는 ‘인도주의 통로’를 개통한 뒤 총 5만여명의 주민이 북부 지역을 떠났다고 밝혔다. 전날 발표한 1만5000여명에서 크게 늘어난 수치다. 다니엘 하가리 이스라엘군 대변인은 “하마스가 북부에서 통제권을 잃었기 때문에 남쪽으로 떠나는 주민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스라엘군은 본격적인 시가전을 앞두고 민간인들에게 남부로 대피할 것으로 촉구해 왔다. 이스라엘군은 지난 4일부터 남쪽으로 향하는 주요 도로인 살라알딘 도로를 하루 4시간씩 개통하고 이 시간에는 피란민 안전을 보장했다. 대규모 인파가 피란길에 나선 8일에는 대피 시간을 한시간 더 연장했다.
이번 전쟁이 시작된 후 현재까지 가자지구 전체 인구(230만명)의 약 70%에 달하는 주민이 이재민이 됐다. 가자시티 내 지상전이 본격화되면서 그동안 도시에 남아있던 이들이 대거 피란길에 올랐지만, 유엔은 여전히 30만명 정도가 북부에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피란민들은 이스라엘군의 포위 이후 구호 물품까지 끊긴 가자시티 상황을 전했다. 휠체어를 탄 가족과 함께 피란 행렬에 나선 아미르 갈반은 가디언에 “지난 3일간 하루에 빵 한조각씩 먹고 버텼다”면서 “우리에겐 물도, 전기도, 밀가루도 없었다”고 말했다. 가족과 함께 탈출한 여성 아비르 아칼라는 AP통신에 “그들은 빵집을 공격했고, 음식도 마실 물도 없었다”면서 “가자시티에는 생명이 없다”고 전했다.
그러나 피란길조차 안전하지 않다는 증언도 계속 나오고 있다. 일부 주민은 대피 도중 이스라엘군의 탱크가 있는 방향에서 총격이 가해졌다고 전했다. 가자시티 알시파 병원 소속 구급대원 아나스 알쿠르드는 지난 5일 남부로 이동하던 중 가자시티 주요 교차로인 쿠웨이트 광장에서 총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현장에는 이스라엘군의 탱크 최소 50대가 있었고, 나를 비롯한 피란민들은 그들을 향해 백기나 흰 담요, 여권을 흔들었다”고 전했다.
16세 소녀 바라는 CNN에 “갈기갈기 찢긴 시체 옆을 지나고 이스라엘 탱크 옆을 지나 계속해서 걸었다”면서 “이건 2023년의 나크바(Nakba)”라고 말했다. ‘재앙’이라는 뜻의 ‘나크바’는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수립 당시 75만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살던 땅에서 쫓겨난 강제이주 조치를 말한다. 바라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옷을 벗고 소지품을 버리라고 했다. 물이 없어서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대피 명령에 따라 일단 피란길에 올랐지만 북부는 물론 남부지역에서도 공격이 이어지며 ‘안전한 곳’을 찾을 수 없다는 절망감도 커지고 있다. 남부 지역으로 피란을 온 한 남성은 CNN에 “가자 북부에 있는 집을 떠나 이곳저곳을 옮겨다녔지만, 그 어디에서도 공습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면서 “가자지구에 안전한 곳은 없다”고 말했다.
이날 하마스가 통제하는 가자지구 보건부는 지난 24시간 동안 가자지구 전체에서 공습으로 인한 사망자 중 절반이 남부에서 나왔으며, 최소 100명 이상이 숨졌다고 밝혔다.
여기에 갈 곳 없는 피란민들이 남부지역에 쏠리며 위생 및 보건 상황도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유엔과 구호단체에 따르면 칸유니스 등 남부 주요 도시에서 600명이 화장실 1개를 공유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관련해 마크 레게브 이스라엘 총리 수석보좌관은 칸 유니스 서쪽 도시 알마와시에 피란민을 위한 ‘특별 인도주의 구역’을 마련하고 있다고 BBC에 밝혔다.
아기를 안은 채 여러 자녀들과 함께 피란 행렬에 나선 나심 알다다는 “일단 시키는 대로 남쪽으로 걷고 있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로 가야할지는 모르겠다”면서 “남쪽에 있는 학교? 길바닥? 누군가의 집? 전혀 모르겠다. 신만이 아실 것”이라고 말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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