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하면 전쟁에 무역마찰, CEO들 ‘지정학 과외’ 받는다
글로벌 대기업들 외교관 대거 영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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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러드 코언(42)은 국제 정치 무대에서 현장 경험을 20대 시절부터 쌓은 인물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자문관으로 발탁됐고, 정권 교체로 국무장관이 힐러리 클린턴으로 바뀐 이후에도 같은 자리를 지켰다. 민간으로 나온 코언은 구글의 사내 싱크탱크인 ‘구글 아이디어(Google Ideas)’ 소장으로 일하며 대외 협력 업무를 맡더니 최근에는 골드만삭스에 영입됐다. 골드만삭스가 코언을 끌어당긴 이유는 경험과 인맥이 풍부한 그를 앞세워 본격적으로 ‘지정학 컨설팅’ 사업에 뛰어들려는 것이다.
미·중 무역 전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까지 지정학적 요인이 글로벌 비즈니스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다국적 기업에서 ‘지정학 전략(geostrategy)’이 중요한 경영상 변수로 떠올랐다. 외부 변수에 대응하기 위해 글로벌 기업들이 국제 정치에 밝은 거물을 영입하고 있고, 주요 컨설팅 업체들은 지정학적 변수의 피해를 줄이는 요령을 귀띔하는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오랫동안 비밀스러운 ‘틈새시장’으로 존재했던 ‘지정학 자문’이 경영 컨설팅의 주류 영역으로 진입했다”고 했다.
◇사장님은 국제 정치 과외 중
기업 CEO나 고위 임원에게 ‘지정학 과외 선생님’으로 활동하는 컨설팅사 브레인은 대개 국제 정치를 경험한 전관(前官) 전문가다. 올해 영국계 글로벌 자문 회사 브런즈윅은 로버트 졸릭 전 세계은행 총재와 파스칼 라미 전 EU 통상 담당 집행위원이라는 두 거물을 영입했다.
골드만삭스에 합류한 재러드 코언은 “2020년대는 모든 것이 지정학적”이라고 말한다. 이전에도 골드만삭스는 정·관계 빅샷들을 영입한 전례가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리시 수낙 영국 총리, 헨리 폴슨 전 미국 재무장관, 맬컴 턴불 전 호주 총리 같은 거물이 거쳐간 곳이 골드만삭스”라며 “그래서 별명이 ‘거번먼트(Government·정부) 삭스’”라고 했다.
거물을 영입한 컨설팅사는 외국 정부나 국제기구의 정책 또는 규제의 의도와 배경을 일러주며 기업들의 미래 불확실성을 줄여준다. 기업이 신흥국에 진출할 때 정치나 외교상 걸림돌이 없는지 미리 점검하는 역할도 해준다. 미국 로비 기업 맥라티 어소시에이츠의 리 파인스타인 회장은 “많은 고객사가 현장에 실제로 있었던 사람들의 조언을 소중히 여긴다”며 “컨설팅 업체마다 은퇴한 정치인과 유명 정부 관료들로 가득 차 있다”고 했다.
지정학 컨설팅 ‘수업료’는 비쌀 수밖에 없다. 영국 헤드헌팅 업체 오거스 번슨 관계자는 “전직 대사, 국방·안보 고위 관료 출신은 지정학 컨설팅으로 시간당 수수료 2000~5000파운드(320만~800만원)를 청구한다”고 FT에 밝혔다.
컨설팅사뿐 아니라 로펌들도 전직 외교관을 대거 영입하고 있다. 글로벌 거대 로펌 덴튼스는 지정학 자문을 전담하는 ‘덴튼스 글로벌 어드바이저스’라는 회사를 별도로 두고 있는데, 미 국무부에서 30년 이상 근무한 대사 출신 관료가 즐비하다. 러시아 대사를 지낸 존 설리번 전 국무부 부장관은 최근 시카고에 본부가 있는 거대 로펌 메이어 브라운에 자리를 잡았다.
◇최고지정학책임자 등장한 日
직접 고위 관료를 채용해 세계 정치의 지형을 읽어주는 책사로 활용하는 기업도 늘어나고 있다. 올해 스티븐 러브그로브 전 영국 국가안보보좌관을 영입한 미국 투자은행(IB) 라자드가 그런 사례다. 헤지펀드의 대부 조지 소로스가 설립한 오픈소사이어티재단 관계자는 “다국적 기업의 임원용 코너 사무실에는 CEO에게 조언을 할 전직 외교관이 항상 있었다”고 했다.
요즘은 빅테크 기업들이 국제 정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다양한 대응 방안을 내놓고 있다. 반도체·AI, 양자 컴퓨팅 같은 첨단 기술 분야에서 주요국끼리 패권 전쟁이 격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2020년 뉴욕 유엔(UN) 본부에 현장 사무소를 만들어 놓고 꾸준히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MS는 UN 관계를 전담하는 임원을 둘 정도로 지정학 대응팀을 키우고 있다.
요즘은 일본 기업들도 분주하게 세계 정세 변화에 안테나를 세우고 있다. 히타치·산토리·미쓰비시UFJ은행 등이 최근 3년 사이 전직 외교관, 국제 관계 전문가, 해외 특파원 출신 언론인을 잇따라 영입한 기업들이다. 그중 히타치와 산토리는 외교관을 영입해 ‘최고지정학책임자(CGO)’라는 직책을 신설했다. 미쓰비시그룹은 사장급 고위 인사가 좌장인 ‘글로벌 정보 위원회’를 구성해 글로벌 신기술 동향을 주기적으로 점검한다. 미쓰비시케미컬은 ‘최고공급망책임자(CSO)’라는 직책을 만들어 외부 변수를 담당하는 역할을 맡겼다.
◇CEO 97% “지정학 위험으로 사업 차질”
기업들이 외부 동향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이유는 지정학적 변수가 실제로 사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컨설팅사 언스트앤드영(EY)이 지난해 말 글로벌 기업 CEO 12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7%가 “지정학 위험으로 계획했던 투자 전략을 변경한 적이 있다”고 했다. 44%는 투자 연기, 41%는 공급망 재편, 34%는 시장 철수, 32%는 투자 중단을 단행했다고 답했다. EY는 “최근 세계 곳곳에서 포퓰리즘과 민족주의가 확산하며 많은 정부가 강력한 경제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어 기업의 불확실성이 커졌다”고 진단했다.
일례로 영국의 거대 에너지 기업 BP는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보유 중이던 러시아 국영 석유 회사 로즈네프트가 지분 19.75%를 매각했다. 영국 정부가 푸틴 정권과 거래하는 영국 기업에 “관계를 끊으라”고 공개 요구했기 때문이다. 아이폰을 납품하는 애플의 핵심 협력 업체인 대만 폭스콘은 최근 탈세 및 불법 토지 사용 혐의로 중국 당국 조사를 받고 있다. 궈타이밍 폭스콘 창업자가 내년 1월 치를 대만 총통 선거 출마를 선언하자 친중계 표가 분산될 것을 우려한 중국 당국이 움직인 것으로 관측된다.
하버드비즈니스리뷰는 “과거 서구 기업은 지정학을 부차적 관심사로 여겼지만 이제 비즈니스와 정치를 분리할 수 없으며, 많은 상황에서 기업도 국가 정체성을 지닌 정치 행위자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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