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박근형·박정자’ 그들이 뭉쳤다…무슨 말이 필요해?

임석규 2023. 11. 9.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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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 출연하는 배우 신구(왼쪽부터), 박정자, 박근형, 김학철, 김리안. 파크컴퍼니 제공

“놓치면 평생 못할 것 같아 좀 과욕을 부렸다.” (신구·87)

“젊어서부터 열망했는데 기회를 못 잡고 잊다시피 살다가 이번에 너무 운 좋게 얻어걸렸다.”(박근형·83)

“초연 때부터 봤는데, 늘 경이로웠다. 이 작품에 참여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박정자·81)

사뮈엘 베케트(1906~1989)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 출연하는 80대 배우 3명은 입을 모아 이 작품에 품어온 짝사랑을 토로했다. 9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 예술가의집에서 열린 간담회 자리였다. 세 배우 모두 60년 넘은 연기 이력에서 이 작품은 처음이다. 신구와 박근형이 같은 무대에서 처음 호흡을 맞추는 작품이기도 하다. 2개월 동안 배역을 전담하는 단일 캐스트 출연이란 점도 눈길을 끈다. 다음 달 19일 개막해 내년 2월18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이어진다.

두 부랑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오지 않는 ‘고도’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고도가 누군지, 왜 그를 기다리는지도, 그가 언제 올지도 모른 채 종잡을 수 없는 대화를 이어가며 끝없이 고도를 기다린다. 육체적, 감성적 인물인 에스트라공(고고) 역은 신구, 지성적, 철학적 인물인 블라디미르(디디) 역은 박근형이 맡았다. 짐꾼이자 노예 럭키는 박정자, 럭키를 부리는 권위적 주인 포조는 김학철(63)이 연기한다. 네 배우의 연기 경력을 모두 합치면 228년에 이른다.

배우들의 각오도 남달랐다. “병력도 있고 나이도 부담이죠. 그 많은 대사를 기억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있고요. 올 초부터 얘기했는데 상당히 주저했어요.” 신구는 “내 안에 있는 진을 모두 토해내면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했다”며 “할 수 있는 힘을 다 빼내서 이 작품에 쏟아붓겠다”고 했다. 박근형은 “신구, 박정자 두 분과 눈빛만으로도 통해서 굉장히 좋은 작품이 나올 것 같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김학철은 “캐스팅 소식을 듣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며 “신구, 박근형, 박정자 선생님 사이에 낄 자격이 있는지, 망신당하면 어떡할까 하는 걱정에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목에 끈을 감은 채 가방까지 들고 연기해야 하는 짐꾼 럭키는 육체적으로 힘이 드는 배역이다. 이 배역을 자청한 박정자는 “작품 얘기를 들었을 때 그냥 문득, 동물적 육감으로 럭키 역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오경택(49) 연출은 “박정자 선생이 럭키 역을 하시겠다고 했을 때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며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도전일 것 같다”고 했다. 고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소년 역도 신인 여성 배우 김리안(26)이 맡는다.

이 작품에 여성이 출연하는 건 이례적이다. 원작자 사뮈엘 베케트가 희곡과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성배우의 연기 자체를 반대했다. 1988년 네덜란드 극단이 여성에게 배역을 맡기자 소송까지 제기했다. 베케트가 작고한 뒤인 1991년, 프랑스 법원은 “여성이 연기해도 베케트의 유산을 훼손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오경택 연출은 “인간의 보편적인 얘기를 다룬 작품이라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고도가 누군지에 대한 해석은 배우에게도, 관객에게도 각자 다를 수 있다. 누구에겐 신일 테고, 어떤 사람에겐 미래의 희망이나 행복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기다림 자체일 수도 있다. “실체도, 형체도 없는 고도를 하염없이 기다리는데, 이게 우리가 현재 사는 모습이구나 싶어요. 그것이 신이든, 자유든, 희망이든 내일은 채워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살지 않습니까. 사람이 포기하지 않고 사는 건 희망 때문이에요. 희망이 없으면 죽게 되죠.” 신구에게 고도는 희망이었다.

부조리극의 대명사로 불리는 이 작품은 1953년 프랑스 파리에서 초연됐다. 베케트는 1969년 이 작품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됐지만 시상식에 불참했고, 인터뷰도 거절했다. 국내에서 이 작품을 말할 때 극단 ‘산울림’과 연출가 임영웅(87)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조합은 1969년 초연 이후 1500회 넘게 공연했다. 2019년 50주년 기념공연 당시 임영웅은 “새로운 ‘고도’가 계속 이어지면 좋겠다”고 했다.

실제로 그 이후 새로운 시각의 ‘고도’가 속속 선보이고 있다. 지난달엔 극단 ‘동숭무대’가 연극 ‘고도’(연출 임정혁)를 무대에 올렸다. 창작집단 ‘로맨틱 용광로’가 지난 8월 제작한 작품엔 개성파 배우 주진모와 배우를 겸하는 연출가 이현우가 주연했다. 앞서 지난 5월엔 극단 ‘고래’가 ‘굴뚝을 기다리며’란 연극으로 고공 농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변용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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