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화폐 아닌 '주권화폐'가 필요한 이유[신간]

유동주 기자 2023. 11. 9.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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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주권화폐: 준비금 은행제도를 넘어서

화폐와 금융에 대한 경제학 교과서의 통념들을 분석하고 비판한 책이 번역됐다. 독일 마틴 루터 대학의 명예교수인 조세프 후버가 쓴 '주권화폐: 준비금 은행제도를 넘어서'는 화폐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화폐의 본질은 교환수단이 아닌 부채의 청산수단이라는 게 이 책의 주장이다. 경제학 교과서는 화폐가 물물교환을 하던 사람들이 그 불편함을 덜고자 서로 합의를 통해 특정 상품을 교환수단으로 선택함으로써 탄생했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 사람들은 화폐가 없을 때 물물교환이 아니라 신용이나 부채 관계에 의존해 거래를 했고 화폐는 최종적인 청산 수단으로서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탄생했다는 분석이다.

저자는 현재 누가 화폐를 발행하는가를 묻는다. 국가 혹은 중앙은행이 아니라 일상에서 사용하는 화폐는 은행계좌의 기록으로 존재하는 은행화폐이며 전체 통화량에서 중앙은행이 발행한 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선진권의 경우에 3%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경제학 교과서는 '은행은 예금자가 저축한 예금을 모아서 대출하는 금융중개기관'이라고 설명하지만 통화량 중에서 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일부라는 점을 고려하면 은행이 예금을 대출로 이어주는 단순한 기관이 아니라는 점을 저자는 강조한다. 대부분의 화폐는 민간 은행이 발행하고 있다는 점도 상기시킨다.

이어 은행이 신용 창조를 통해 은행화폐를 창조한다는 사실이 분명히 받아들여지면서도 예금이 대출의 원천이라는 통념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예금이 대출의 원천이 아니라 대출이 예금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일상에서도 은행은 대출을 해줄 때 현금을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차입인의 예금계좌에 그만큼의 액수를 기입해준다. 이처럼 대출이 예금을 창조한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따라서 대출에 의해 창조된 예금은 재대출의 재원이 아니고 예금은 은행이 고객에 지고 있는 부채를 의미할 뿐이며 은행은 새로운 예금을 생성하여 대출을 실행할 수 있기 때문에 대출을 위한 별도의 재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지급준비금에 대해서도 새롭게 설명한다. 대부분 현금이 아니며 은행들 간의 거래에만 유통되는 계좌상의 화폐란 사실을 환기한다. 경제학 교과서는 '은행이 지급준비금을 중앙은행에 예치한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은행이 마치 지급 준비를 위해서 현금을 중앙은행에 입금하는 듯이 설명한다. 하지만 준비금은 처음부터 중앙은행의 신용으로 창조된 비현금화폐로 은행 간 거래에만 사용되며 그 이름과 달리 현금 지급에 대비하는 역할을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은행은 중앙은행과 거래에서 준비금을 일대일(1:1)로 현금과 교환할 수 있지만 준비금 자체는 고객에게 직접 전달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은행들은 왜 예금을 유치하기 위해 경쟁하는가. 각 은행들은 고객의 요청에 따라 다른 은행들에게 결제할 수 있도록 충분한 준비금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한 은행이 다른 은행으로 예금이 일방적으로 이체된다면 그 은행의 준비금은 고갈될 수 있다. 결국 예금 유치는 대출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준비금 고갈을 막기 위해서란 설명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중요한 사실은 지급준비금 규모가 통화량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경제학 교과서는 은행이 보유한 지급준비금의 규모와 통화량 간에는 안정적 비례관계가 있는 것처럼 가정한다. 즉 대출의 규모는 기존 지급준비금 규모의 제약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지급준비금과 통화량 간의 안정적 관계는 현실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저자가 현행 은행화폐체제에서의 경기변동을 요약하는 건 현재의 한국 현실과 흡사하다."경기 전망이 좋으면 은행들은 이윤을 쫓아서 대출을 늘리려 하고 다른 한편으로 가계나 기업의 대출 수요도 늘어난다. 따라서 경제의 낙관적 분위기는 쉽게 경기 과열과 자산가격의 거품을 낳아 금융위기를 야기할 위험이 있다. 특히 새롭게 창조된 화폐가 부동산과 금융자산의 매수를 뒷받침하게 되면 고질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대출의 증가는 자산에 대한 수요를 높이지만, 그러한 자산시장의 공급은 매우 늦게 반응하기 때문에 쉽게 자산가격이 급등한다. 더구나 대부분의 대출이 기존 자산의 매입에 사용되는지라 실물 경제의 생산능력은 그만큼 개선되지 않는다. "민간부채 수준이 소득증가보다 빠르게 증가한다"는 이 책의 분석처럼 민간 부채의 수준은 높아지지만 국민소득을 직접적으로 높이지 못한다.

결국 저자는 부채를 수반하지 않는 화폐의 발행을 현 경제시스템의 고질적 문제의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국가가 중앙은행을 통해 '부채 아닌 화폐(debt-free money)'를 창조하고 그 화폐를 은행의 대출이 아니라 정부의 지출을 통해 공급하는 주권화폐체제를 제안한다. 과연 '부채 아닌 화폐'를 상상할 수 있을까. 저자는 미국의 주화를 주권화폐의 원형으로 얘기한다. 미국의 주화는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것이 아니라 재무부가 발행하기 때문에 미국의 지폐는 중앙은행의 부채이지만 주화는 중앙은행의 자산으로 기록된단 설명이다.

후버 교수의 주장은 그 혼자만의 독특한 입장이 아니다. 20세기의 초반부터 화폐를 은행의 부채로서 발행하는 현대 화폐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은 등장했다. 시카고 학파에서도 부분지급준비금제도를 완전 지급준비제도로 전환하자는 이른바 '시카고 플랜'을 제안했다. 2012년에는 구제통화기금(IMF) 소속 경제학자들이 '시카고 플랜'을 다시 상기시키며 완전지급준비 제도로의 개혁 방안을 제안했다.

저자인 후버 교수는 1980년대엔 여러 정부 및 기업의 산업생태학 관련 정책 자문위원으로 활동했고 뉘른베르크의 환경은행(Umweltbank)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2009년엔 화폐 개혁을 위해 활동하는 독일 비영리 단체인 모네타티브(Monetative)를 설립했다.

번역한 유승경씨는 현재 정치경제연구소 대안의 수석연구위원이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일리노이 주립대와 프랑스 사회과학대학원에서 공부했다. LG경제연구원, 우리금융경영연구소에서 근무하고 경기도 경제과학진흥원의 원장을 역임했다.

◇주권화폐: 준비금 은행제도를 넘어서/조세프 후버, 옮긴이 유승경/진인진/2만7000원

유동주 기자 lawmaker@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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