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환이 자결한 곳에 빨간 꽃이 피었다 [더 라이프이스트-성문 밖 첫 동네, 충정로 이야기]
21, 프랑스 대사관
충정로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 자리에는 원래 충정공 민영환(忠正公 閔泳煥1862~1905)의 별서(別墅, 별장)가 있었다. 예조판서 등을 지낸 민영환은 1905년 을사늑약 때에 자결을 통해 조약의 부당성과 일본의 조선 침탈을 만천하에 알린 문신이다.
민영환의 집은 안국동 조계사 옆에 있었으나 만초천 맑은 물이 흐르고 안산에서 내려오는 아현의 지세가 아름다운 이곳에 별장을 지었다. 조무래기들은 만초천에서 조개를 주워 올렸다. 이곳에 얼마나 조개가 많았는지 이 지역은 조개 합(蛤)자를 써서 합동(蛤洞)이라 한다. 서대문구 합동 30번지이다. 아낙들은 만초천에서 멱을 감고 논과 개천의 둔치에서 미나리를 뜯어 저녁을 준비했을 것이다. 그래서 합동의 옆동네는 동네 이름도 물결미, 미나리 근자를 써서 미근동(渼芹洞, 미나리가 물결치는 동네)이 아니던가? 남산으로 올라가는 성벽이 그림처럼 드리워진 아름다운 동네, 별장을 짓고 가끔 찾아 어지러운 국정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의 지명이 민영환의 시호인 충정공(忠正公)을 따서 ‘충정로’가 됐다.
충정로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은 해방 이후로, 일제 강점기에는 죽첨정(竹添町)이라 불렸다. 죽첨은 갑신정변 때 우리나라에 온 일본 공사 죽첨진일랑(竹添進一郞,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이름이다. 죽첨이 서대문 밖, 이곳 어딘가에서 살았기 때문에 죽첨정(竹添町)이라 했다. 이곳의 지명에 '죽첨'이 많이 활용됐다. 미동초등학교 앞에는 서대문에서 출발하는 전차역인 ‘죽첨역(竹添驛)’이 있었고 강북삼성병원 내에 있는 김구 선생님이 순국하신 경교장도 일제 강점기에는 ‘죽첨장(竹添莊)’이라 했다.
해방이 되고 일본이 물러갔다. 1946년 10월 1일 서울시청 회의실에서 시장과 역사학자 등이 모여 일제식 명칭을 우리의 명신, 명장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조선시대의 문신과 무신, 그리고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승려의 시호로 일제강점기의 가로 명을 대체했다. 명동 본정(本町, 혼마치)은 일본인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던 번화한 거리다. 이곳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시호를 따라 충무로라 명명했다. 원효대사의 이름을 딴 원효로, 광화문통은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려 세종로라고 했다. 이 때 죽첨정이 일본의 을사늑약에 충절을 지킨 충정공 민영환의 시호인 충정로로 바뀐 것이다.
충정공 민영환의 별장이 프랑스 대사관이 된 건 언제일까? 경술국치가 있던 해인 1910년 10월 9일 매일신보를 보자. ”불국 총영사관(佛國總領事館)은 일전에 신문 외(신문로 밖) 고 민충정공의 정자로 이접하였다는데 기내용인즉 해 정자를 금대 1만 2천원에 매입하였다더라.“
원래 프랑스 공사관은 경향신문 앞 지금의 창덕여중 자리에 있었다. 정동에서도 지대가 높은 곳이라 경관이 매우 아름다웠다. 건물도 화려하게 지어 기둥은 화강석으로, 지붕은 순 아연판으로 올려 공사관 중에도 멋진 외관을 자랑한 최신식 건물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나라를 빼앗겨 외교권을 잃은 후 공사관이 필요 없어지자, 공사관은 영사관급으로 조정됐다. 이 자리에는 서대문 보통학교가 들어서고 프랑스 영사관은 충정로로 이전한 것이다.
지금의 프랑스 대사관은 1960년 김중업에 의해 설계됐다. 동아일보와 월간 space가 함께 선정한 ‘한국 현대건축 명작’ 2위에 오른 아름다운 건물이다. 1위는 1971년 건립한 김수근의 ‘공간 사옥’이다. 1위 김수근과 2위 김중업, 두 사람은 한국 근대사의 걸출한 건축가들이다. 공간 사옥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원형이 보존되었다면, 프랑스 대사관은 우리 소유권 밖이라서 외형이 많이 손상됐다. 최근에 개축에 가까운 보수를 했다.
현대 건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르 꼬르뷔지에’의 수제자인 김중업이 주한 프랑스 대사로부터 대사관 지명현상설계에 초빙된 것은 1959년 봄이다. 그는 충정로 언덕에 네 마리의 학을 연상시키는 건물을 지었다. 조선시대 궁궐 처마의 날렵한 선을 현대적 건축물의 소재를 활용해 재해석 한 것이다. 무거운 지붕의 높낮이를 조정하니 학의 날개 짓과 같은 날렵한 건축물이 탄생했다. 콘크리트 덩어리의 육중한 지붕이 학 모양으로 날아갈 기세다. 카이스트 건축학과 조현정교수는 ”건축, 미술, 조각의 통합에 대한 열망, 즉 예술 종합의 자장“으로 건물을 해석했다. 관저의 외벽 모자이크는 김중업과 친분이 있는 서양화가들이 옛 기와와 자기를 부숴 제작했다고 한다. 건물이 기능성의 테두리를 벗고 예술작품이 된 것이다.
신문사에 근무할 때 15층 사무실 창밖으로 프랑스 대사관의 아름다운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다. 여름에는 나뭇잎이 무성해 형체가 보이지 않지만 11월이 되면 건물의 외양이 드러났다. 건축물과 역사에 아무런 지식이 없을 때도 그 건물은 참 아름다웠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것을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 하지 않나. 프랑스 대사관은 충정로역 주변의 오피스텔 숲 한가운데 앉은 한 마리 학의 모습이었다.
1959년 12월, 김중업의 작품이 현상 공모에서 당선됐다. 공사는 1960년 정초에 시작된다. 1960년은 4.19가 일어난 해이다. 1961년은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우리 현대사가 용트림하는 시기였다. 정국이 불안정하니 프랑스 본국에서 공사비 송금을 늦추었다. 김중업은 개인 어음을 남발하면서 대사관 사저와 집무실, 영사관, 직원 숙소를 마무리했다. 한국전쟁 후 재건하기에 바빠 외관은 엄두도 못 내던 시절이다. 건축 공법이 있을 리 없고 벽돌 쌓기에도 바쁠 때가 아닌가? 김중업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자신의 설계안대로 작업을 마무리했다. 그의 나이 38세 되던 해이다. 이 작품을 마무리하고 김중업은 프랑스로부터 훈장(레종 도뇌르)을 받는다. 슈발리에(Chevlier, 기사), 당시 외국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이다.
충정공 민영환이 자결한 곳에 빨간 꽃이 피었다. 혈죽(血竹), 붉은 대나무. 피처럼 붉으나 대나무처럼 곧고 꺾이지 않는 혈죽이다. 이것을 심전 안중식(心田 安重植) 선생이 그림으로 남겼다. 혈죽도(血竹圖)를 감상해 보자.
민영환과 프랑스 대사관. 프랑스는 우리가 알다시피 문화의 본고장이다. 수많은 문인, 화가들을 피워낸 예술의 나라가 아닌가. 민영환이 자결 후, 혈죽이 피어난 것처럼 그가 살던 집에 문화의 나라 프랑스 대사관이 꽃처럼 피어났다고 하면 억지일까?
”여러분은 어찌 헤아리지 못하는가?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 2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구천에서도 여러분을 도울 것을 약속한다.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들은 억천만 배 더욱 분발하여 의지를 굳건히 하고 학문에 힘쓰며 마음과 힘을 합하여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는 마땅히 어두운 저승에서라도 기뻐 웃으리다. 아, 조금도 희망을 잃지 말라! 우리 대한 제국 2천만 동포에게 작별하며 고하노라.“
목숨을 끊으면서도 희망을 노래한 사람, 충정공 민영환 선생. '아! 조금도 희망을 잃지 말라!' 충정공 선생의 마지막 외침이 마음을 울린다. 프랑스대사관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죽은 곳에서 혈죽이 피어나는 기사회생(起死回生)' 이다. 그리고 충정로의 이름이 바뀌지 않는 한 그의 이름도 기억될 것이다. 다음 편에는 김중업과 르 꼬르뷔지에를 살펴본다.
<한경닷컴 The Lifeist> 한이수 엔에프컨소시엄에이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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