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조각가와 K-조각] <7>영국 현대 조각사의 대안적 계보, 토니 크랙의 오브제와 전통 조각
터너상 수상자인 토니 크랙(74)은 현존하는 영국의 대표적인 조각가다. 그는 안소니 곰리나 아니시 카푸어 등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영국 조각’의 흐름을 선도해왔고, 2000년대 중반부터는 독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그는 헨리 무어로부터 시작된 영국 모더니스트 조각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지난 30여년간 미술사의 흐름에 발맞춰 자신만의 독립적인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상반된 조각의 흐름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해왔다. 그는 개념적으로는 전통적인 조각과 차용한 오브제의 영역 사이에서, 목재나 청동의 전통적인 재료와 유리나 유리 섬유 등의 공예적인 재료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해왔다.
■첫 번째 순간: 오브제 설치와 비조각적인 조형물 사이에서
당시 미술계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북쪽에서 본 영국'(1981)과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스펙트럼'(1983)은 리처드 롱의 유명한 '걸어서 만들어진 선(A Line Made by Walking)'(1967)에 대한 젊은 조각가의 도전장이었다. 롱의 조각은 1970년대 초 ‘어스 아트’의 부분으로서 주어진 재료의 물질성과 상징적인 의미에 최대한 충실히 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조각에서의 모더니즘을 계승한다.
이에 반하여 벽면이나 바닥에 놓인 크랙의 설치는 일상적인 공구나 장난감으로 이뤄져 있다. 색상이 덧입혀진 플라스틱은 물건의 고유 재료나 물질을 부정한다. 게다가 물건의 표면에 칠해진 화려한 색상은 조각과 회화의 경계도 허문다. 벽에 밀착하거나 전시장 바닥에 흩어져 있는 '북쪽에서 본 영국'과 '스펙트럼'은 공간을 점유하고 직립하는 전통적인 조각의 전시 방식에 반한다.
실제로 1980년대 초 설치 작업에서 작가는 컵, 접시, 삽의 물건을 접합하거나 변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시했다. ‘물건’들은 전체 설치의 부분으로서 독립해서 존재한다. 석고, 청동, 나무, 돌과 같은 소조(틀로 짜서 부어 형태를 만드는)나 조각(재료를 깎는)의 공정을 거치지 않는다. 이를 계기로 공산품으로 된 거대 설치가 등장하게 됐다.
재료의 측면에서도 크랙은 1960년대 후반에 예술가로 전향하기 이전 유기화학 실험 연구실에서 근무했었고 이를 바탕으로 유리와 유리 섬유의 재료를 적극적으로 개발해왔다. 이때 작가는 유리병 자체를 오브제처럼 사용하기도 했고 유리 재료로 물건을 새로 제작하기도 했다. 이는 재료에 관한 작가의 탐구 정신과 일상적인 물건이나 가벼운 재료를 사용해서 전통적인 조각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작가의 이중적인 목표를 보여준다.
■두 번째 순간: 구상과 추상 조각 사이에서
2010년부터 크랙은 인물 조각으로 회귀했다. 그런데 움직이는 신체를 표현한 ‘불특정한 존재들’ 시리즈는 추상적이면서도 구상적이다. 재료의 측면에서도 크랙의 조각은 복합적이다. 청동과 나무 등의 전통적인 재료를 사용한 복고적인 작업이지만 합판을 켜켜이 쌓아 올렸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전통적인 목조 조각의 제작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얼핏 보기에는 나무나 청동으로 만든 것과 같이 보이지만 실은 유리 섬유를 사용해서 모방 효과를 낸 것이다.
'달리는 사람'에서 넘실거리는 곡선은 인간이 전속력으로 뛰어가는 순간적인 움직임을 표현한다. 이때 인간의 신체적인 움직임이 조각의 윤곽선을 통해서도 암시되지만 두 개의 조각이 겹치게 되면서 사이 빈 공간이 만들어내는 외곽선도 신체의 곡선을 연상시킨다.
멀리서 보면 추상적으로 보이지만, 각각의 조각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면 얼굴의 옆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즉 관람객의 시점에 따라 다양한 신체의 부분이 암시되고 이에 따라 관객의 입장에서는 구상적이면서도 추상적으로 보인다. 게다가 얼핏 보기에 재료는 부드럽고 따듯한 나무를 연상시키지만 유리 섬유의 매끈한 표면 효과는 기계적인 인상을 준다.
이처럼 1980년대 조각의 모더니즘과 반모더니즘의 이분법에 대항해 벽과 바닥에 일상적인 물건을 나열하면서 당시 조각계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크랙은 모더니즘 조각과 설치, 추상과 구상, 유기적인 형태와 기계적인 효과 등의 전혀 다른 특징과 영역 사이에 다리를 놓아왔다.
이를 통해 크랙은 지난 40여년간 그야말로 다양하고 풍부한 작품 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김구림 작가가 자신의 개인전에서 던진 질문이 떠오른다. "왜 한 작가가 같은 스타일을 평생 고수해야 하는가?"
고동연 미술평론가·이화여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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