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질환자 공동체’ 예산 삭감 안 된다[시평]

2023. 11. 9.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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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웅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정신질환 치료 매년 수백만 명
숨기고 차별하는 분위기 심각
국가 책임 목소리 갈수록 커져
중증 정신질환자 교류 움직임
용기 있는 도전 적극 지원해야
시범사업 예산 깎겠다니 황당

정신질환은 이제 더는 남의 일이 아니다. 2009년 연간 200여만 명이 정신질환 치료를 받았고, 2019년에는 311만여 명으로 늘었다. 정신질환을 먼 나라 얘기처럼 듣고 자랐던 부모 세대는 정신질환이 있는 자녀를 어떻게 대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기 일쑤다. 치료를 받으면 나을 것이라고 믿고 강제로라도 입원시켜 보지만, 정신과 약물치료로 낫는 경우는 드물다. 강제 입원 경험이 있는 자녀는 그 때문에 트라우마를 경험하기도 하는데, 이를 보는 부모는 더 큰 충격을 받기도 한다. 치료받아 낫게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약 복용을 강권하지만, 장기간 약 복용으로 지능과 사회적 기능이 더 떨어지는 자녀를 보면서 날벼락 맞은 듯 가정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똑똑하고, 전도유망했던 자녀에게 닥친 정신질환을 지켜보는 부모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교수나 교사든, 정치인이든 기업인이든 근로자든 분노와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있듯이 정신질환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정신질환자의 분노나 폭력은 모두 ‘정신질환’ 탓으로 돌린다. 이 때문에 정신질환을 차별하는 문화가 더 깊이 뿌리내린다. 사건 사고가 있으면 언론은 정신질환과 연관되지 않았는지 취재하고, 여론은 정신질환자를 강제 입원시켜 사회에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야단이다. 이런 분위기 탓에 가족 중 정신질환이 있으면 이를 꼭꼭 숨겨 두기 일쑤다. 와상(臥床) 상태도 아닌데 5년 이상 정신병원에 있는 정신질환자가 1000명이 넘는다. 변변한 직장생활을 하지 못한 채 수십 년 약물치료를 계속한 50대 전후 자녀를 둔 부모는 모든 것을 체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발달장애인처럼 정신질환자도 국가가 책임지라는 요구가 나온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중증 정신질환을 겪고 있지만, 사회 활동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진 젊은이들이 용기 있게 나섰다. ‘왜 정신질환에 걸렸을까’ ‘중증 정신질환 상태에서도 다시 사회 활동을 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중증 정신질환으로 사회에서 고립된 동료들,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시민들에게 경험을 토대로 대응 방법을 조언해 준다. 부모들에게 정신질환 자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조언하기도 한다. 심한 스티그마(stigma·오명) 때문에 외출조차 꺼리던 정신질환자가 밖으로 나와 이들과 교류하면서 치료·재활·회복의 방법을 토론한다. 정신질환자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있다. 고립됐을 때 경험했던 자살 충동, 강제 입원시킨 가족에 대한 분노를 해소하는 방법, 다시 사회 생활을 해 나갈 지혜를 서로 배워 가는 중이다.

젊은이들이 용기를 내어 이런 활동을 하는 것은 선진국 정신질환자 단체 지도자와의 교류에서 얻은 영감도 큰 몫을 했다. 동료 지원을 통한 정신질환자 공동체 만들기는 정신질환자의 사회 통합만이 아니라, 정신질환 예방에도 크게 기여하므로 1990년대를 거치면서 선진국에서는 광범위하게 확산하고 있다. 조지 부시 행정부가 정신건강 신자유위원회를 구성해 정신건강 정책의 개혁을 선언한 뒤인 2007년부터 미국은 정신질환을 선(先)경험한 동료 지원 서비스도 의료급여(Medicaid)로 제공될 수 있게 됐다. 3만 명이 넘는 동료 지원자가 정신건강 서비스 제공자로 활동한다고 한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도 선경험 있는 정신질환자를 정신건강 서비스 제공자로 투입할 것을 권고한다. 우리 젊은이들도 이런 국제 흐름에 동참하는 셈이다.

정부는 최근 혁신 정신건강 정책을 수립하겠다고 선언했다. ‘선경험 있는 정신질환자의 동료 지원’ 서비스 제공을 통해 우리 실정에 맞는 근거 기반(evidence based) 정책을 찾아야 한다.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한 눈물겨운 노력 끝에 5억 원 남짓한 정부 예산으로 시범 사업을 시작한 지 두 해가 됐다. 서울 1개 동 몇 구역 보도블록 교체 비용에도 못 미치는 액수다. 이 예산이 전면 삭감될 위기라면서 백방으로 호소문을 돌리고 있다. 정신질환을 겪는 당사자 활동가, 동료 지원자의 경험을 모으지 않고, 그 목소리를 듣지 않고 혁신은 있을 수 없다. 혁신 정신건강 정책의 근거를 제공할 이들의 활동은 정신질환자와 그 부모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기도 하다. 그 불씨를 여기서 꺼뜨려서는 안 된다.

제철웅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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