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장’ 알리는 370년 전통 종가집 종부
160m 깊이 우물에서 퍼올린 지하수와 죽염으로 메주 만들어
메주 발효시킬 땐 유기짚으로 묶어 고초균 활성화시켜
원형의 모습과 맛을 잃지 않으며 다양한 시도 끝에 딸기고추장·간장김치 탄생시켜
K-장으로 세계인 입맛 다스려…"앞으로 장 담그기 문화 보존 앞설 것"
“장(醬)은 우리 음식의 근간이다. 우리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한국의 주거문화·세시풍속·기복신앙·전통과학적 요소를 복합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문화적 자산이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 나온 ‘장 담그기’ 문화에 관한 설명이다. 장 담그기 문화는 2018년 12월27일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제137호로 지정됐다.
기순도 고려전통식품 대표는 장흥 고씨 양진재파 종가 10대 종부이다. 말하자면, 장흥 고씨 집안의 10번째 맏며느리인 셈이다. 가문에서는 370년 동안 장을 직접 담가왔다. 기 대표 역시 후손 대대로 내려져 온 장 담그기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고 있다.
그러한 점을 인정 받아 2008년 ‘대한민국 전통식품명인’ 35호로 지정됐다.
◆자연은 최상의 재료다
자연은 최상의 재료를 선물한다. 기순도 명인은 그중에서도 좋은 것을 고르고 또 고른다.
이를 테면 된장을 만들기 위해선 물·콩·소금이 필요하다. 기 명인은 백태 중에서도 껍질이 얇은 것을, 햇콩 중에서도 벌레가 먹지 않은 것을 사용한다.
물은 160m 깊이의 우물에서 끌어 올린 지하수를 사용한다. 이 지하수는 부드러운 물이라는 의미의 ‘연수’다. 연수는 칼슘이온이나 마그네슘이온을 적게 포함하고 있는 물로 생활 곳곳에 유용하게 사용된다.
기 명인은 “장맛이 좋은 이유는 물맛이 좋아서 그렇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고 말했다.
소금으로는 죽염을 사용한다. 죽염은 간수가 잘 빠진 서해안 천일염을 왕대나무통에 가득 담은 후 700℃ 이상의 소나무 장작불에 3박 4일 구워 만든다. 그러면 대는 타서 없어지고 소금 기둥만 남게 되는데 이때 특유의 단맛과 깊은 맛이 배어난다.
단단해진 소금 기둥을 잘게 빻아서 장에 넣는다. 많이 구울 때에는 2000가마를 굽는다. 한가마에서 소금 20kg가 만들어지므로, 전체 생산량만 40t에 달한다.
된장에만 국한한 이야기가 아니다. 고추장을 만들 때는 설탕 대신 조청을 활용한다. 조청은 겉보리를 틔워 직접 만든 엿기름을 고아 만든다.
보통 겉보리에서 뿌리·싹이 나오려면 5일 정도가 걸린다. 5일 동안 겉보리를 정성껏 씻고, 물 표면 위로 뜨는 쭉정이는 잘 걸러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엿기름에는 ‘아밀라아제’라는 효소가 들어 있어 탄수화물을 포도당으로 잘 분해해 ‘천연 소화제’ 역할을 한다.
좋은 재료는 재활용해도 좋다. 엿기름을 만들고 남은 물은 체에 잘 걸러 식혜를 만드는 데 쓴다. 종가집이어서 손님 접대용으로 식혜를 자주 올리다보니 어떻게 하면 식혜의 감칠맛을 살릴까 고민하게 됐다는 기 명인.
‘감초’에서 해답을 얻었다. 감초는 해독작용, 피부염·간염 완화 등 효과가 있는 약재다. ‘나라의 원로’라는 뜻의 국로(國老)가 별칭일 만큼 약의 독소를 없애 약효가 잘 발현되도록 한다. 감초 넣은 식혜는 깔끔하고, 끝맛이 시원하다.
◆두개의 비밀병기… 홍국균·고초균
장은 발효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발효의 사전적 정의는 ‘미생물에 의해 유기화합물을 분해해 알코올류·유기산류·이산화탄소 따위를 생성하는 작용’이다. 발효에 관여하는 미생물에는 곰팡이·효모·세균 등이 있다.
보통 한 가지 혹은 두 가지 미생물이 결합해 발효를 주도한다. 하지만 간장·된장·고추장 등 전통 장에는 3가지 미생물이 모두 관여한다. 그러니 장은 가장 복합적인 발효식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장의 풍미를 살리기 위해선 미생물의 활동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기 명인은 2015년 메주에서 붉은색 곰팡이를 처음 발견했다. 황색·흰색 곰팡이만 있던 메주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곰팡이를 발견한 기 명인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전남대학교 식품영양학과에 정밀 검사를 의뢰한 결과, 붉은색 곰팡이는 ‘홍국균’인 것으로 드러났다. 홍국균은 붉은누룩곰팡이를 멥쌀밥의 밥알 표면에 배양한 곰팡이를 말한다.
주 성분은 ‘모나콜린K’다. 이 성분은 혈중 콜레스테롤 농도를 개선하고 혈압·혈당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판 메주는 홍국균을 일부러 접종하기도 하지만, 기 명인은 실내 온도를 30~35℃로 맞춘 황토방에서 메주를 발효시켜 홍국균이 발생하기 좋은 조건을 만들었다.
메주는 통기가 잘 되는 곳에서 발효한다. 이때 유기짚으로 묶어 매달아 말린다. 유기짚에는 바실러스 섭틸러스(고초균)이 있다. 고초균은 40℃ 정도의 온도와 적당한 습도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30분마다 2배씩 증가해 10시간이 지나면 100만마리 이상이 된다.
발효가 완성되면 청국장 10g에 약 10억마리의 고초균이 존재하게 된다. 고초균은 단단한 콩의 단백질을 다양한 아미노산과 섬유질 분해효소로 분해한다.
고초균이 많이 들어 있는 청국장을 먹으면 필수 영양 성분을 균형 있게 섭취할 수 있다. 소화가 잘 되는 것은 덤이다. 심지어 청국장에서 역한 냄새를 제거하는 역할도 한다.
"이 모든 게 다 균 덕분”이라며 균의 중요성을 설파한 기 명인은 현재 고초균 외에도 바실러스 속 균주 4종과 리시니바실러스 속 균주 1종을 동정해 따로 보관하고 있다. 훗날 극심한 기후 위기가 도래할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이 같은 천연 발효로 기 명인의 전통식품은 ‘전통식품 품질 인증’을 받았다. 전통식품 품질 인증제는 국내산 농·수산물을 주원료로 제조·가공·조리해 우리 고유의 맛·향·색을 내는 우수한 전통식품을 대상으로 농림축산식품부가 품질을 보증하는 제도다. 10월31일 기준 106개 인증품목이 존재한다.
◆'딸기고추장' ‘간장김치’로 ‘K-장’을 더 널리
전남 담양에 위치한 기 명인 자택 부지는 자그마치 1만9834㎡(6000평)이다. 더 눈길을 끄는 건 1200개 넘는 장독대가 늠름함 위엄을 뽐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중 24개는 11개 나라에서 온 셰프들이 직접 장 담그기 체험을 하고 서명한 것이다. 외국 유명 셰프들도 한국에 오면 기 명인을 종종 찾곤 한다. 외국인의 발길을 사로잡은 비결은 무엇일까.
첫번째는 원형의 모습과 맛을 잃지 않는 것이다. 기 명인은 1년짜리 ‘청장’, 2~3년 ‘중장’, 5년 ‘진장’ 외에도 ‘씨간장’까지 보존하고 있다.
씨간장은 아주 깊은 맛을 내는 간장으로 별도의 항아리에 보관한다. 제사나 명절 때 소량이 쓰일 뿐, 절대 판매하지 않는다. 씨간장 맛을 유지하기 위해 5년 이상 숙성된 진장을 첨장(添醬)한다.
기 명인은 씨간장을 보존하는 이유에 대해 “우리의 것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찾았을 때 기 명인의 씨간장이 국빈 만찬 메인요리 소스로 활용됐다.
지난해 7월에는 미국의 유명 햄버거 브랜드 ‘쉑쉑’이 한국 론칭 6주년을 기념해 ‘코리안 헤리티지’(Korean Heritage)를 주제로 한정판 메뉴를 내놨다.
‘더 헤리티지 370’ 메뉴에는 ‘들깨 진장 아이올리소스’로 버무린 궁채 장아찌가 담겼다. 이 진장은 기 명인의 씨간장을 첨장한 것으로, 미국 음식에 한국 전통의 장 문화를 녹여냈다는 평을 들었다.
두번째는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를 결합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결과물이 딸기고추장이다. 전남 담양은 딸기 주산지어서 딸기가 많이 나온다.
그런데 늘 재고 처리가 말썽이었다. 이에 지방자치단체 관계자가 기 명인에게 남은 딸기 활용 방안에 대한 아이디어가 없는지 물었다. 기 명인의 응답은 ‘딸기 고추장’이었다. 기 명인은 “딸기 고추장은 일반 고추장보다 덜 맵고, 더 단 것이 특징”이라며 “아이들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뿐더러 외국인들도 거부감 없이 즐겨 먹는다”고 덧붙였다.
간장김치도 빼놓을 수 없다. 간장김치는 일반적인 인식과 다르게 검거나 짜지 않다. 일반 김치와 똑같이 붉은 빛깔을 띈다. 다만 대부분의 김치가 젓갈로 맛을 내는 반면 간장김치는 간장으로 맛을 낸다는 것이 차이다. 더욱 감칠맛이 살아난다.
서울은 물론 외국에서도 간장김치를 맛본 사람들은 꾸준히 그 감칠맛에 반해 간장김치를 찾는다.
기 명인이 걸어온 길은 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기 명인은 2005년부터 메주를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메주 바자회’를 열어 왔다. 올해로 50년째다.
또 올 10월14일에는 제1회 발효 학교를 개교했다. 발효 학교는 전통 발효 마스터를 기르기 위한 학교다. 수업은 12월2일까지 총 16차례에 걸쳐 매주 토요일마다 기 명인 자택에서 진행된다.
기 명인은 “장을 만드는 일은 복을 짓는 것과 같아 숭고한 의식 그 자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장 담그기 문화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을 내비쳤다.
고품질 농산물 생산, 차별화한 브랜딩, 안정적인 판로 확보, 원가 절감, 해외 시장 진출 등…. 오늘날 성공 영농을 위한 전략에는 수십가지가 요구된다. 한두곳 선도농가의 비결로는 각자의 해답을 쉬이 얻기 어렵다. 각 분야 고수가 걸어간 길을 참고해 나만의 이정표를 만들어보자.
‘고수의 N계명’은 N명의 농부에게 듣는 성공 노하우다. 그리고 한걸음 먼저 나아간 이들이 전하는 N가지 영농 지침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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