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불법 반출 아픔에도…간절함으로 지킨 '기록 문화의 꽃'
(평창=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실록을 봉안할 곳의 지세를 살피는 일로 정선 군수를 거느리고 오대산에 들어가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선조실록 중에서)
1605년 10월 강원 감사 윤수민이 오대산을 조사한 결과를 조정에 보고했다.
임진왜란으로 실록과 같은 주요 서적을 보관하던 사고(史庫) 3곳이 소실되면서 당시 조선 왕실이 가장 신경 썼던 일 중 하나가 바로 새로운 사고를 정하는 일이었다.
후보에 올랐던 오대산 일대는 물과 불, 바람이 침입하지 못하는 상서로운 곳이었다고 전한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설명에 따르면 1606년에 세운 오대산 사고는 참봉(參奉·조선시대 종9품 관직) 2명과 군인 60명, 승려 20명이 관리하고 사고를 지키는 사찰이 있을 만큼 중요한 장소였다.
그러나 오대산에 피어난 '기록 문화의 꽃'은 역사의 굴곡 속에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다.
조선 왕조의 중요한 기록물인 실록과 의궤 등을 보관해왔던 오대산 사고는 1910년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도서 정리 사업'이라는 명분 속에 제 기능을 잃어갔다.
1909년 작성한 '오대산 사고 장서 목록' 자료에는 당시 사고에 조선왕조실록과 의궤 등 총 4천416책이 있었다고 하나, 여러 기관을 거치며 자료들이 흩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일본으로 반출된 자료가 조선왕조실록이다.
오대산 사고에는 역대 국왕의 행적을 정리한 실록 788책이 있었으나 1913년 10∼11월 두 차례에 걸쳐 실록 전체가 도쿄(東京)제국대학으로 반출됐다.
이후 1923년 9월 발생한 간토(關東) 대지진으로 오대산 사고본 상당량이 불에 탔고, 가까스로 화마를 피한 27책이 1932년 경성제국대학으로 돌아왔다.
시민단체와 불교계, 정부의 끈질긴 요구 끝에 반환 논의가 본격화한 건 2000년대 들어서다.
일본 측은 2006년 또 다른 오대산 사고본 47책을 기증 형식으로 넘겼고, 이후 국립고궁박물관은 2018년 일본 경매에 등장한 '효종실록'을 추가로 사들였다.
현재 국내에 있는 오대산 사고본 실록은 총 75책, 모두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특히 오대산 사고본 실록은 동경제국대학, 경성제국대학 등의 장서인(藏書印·책이나 그림 등의 소장자가 자기 소유임을 나타내기 위해 찍는 도장)이 남아있어 일제강점기 왕실 도서가 겪은 역경을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 왕실에서 혼례나 장례, 잔치, 국왕의 행차 등 중요한 행사를 치른 뒤 그 결과를 글과 그림으로 정리한 '보고서'인 의궤 역시 비슷한 아픔을 거쳤다.
박수희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관이 쓴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과 궁내청 환수 의궤의 현황과 의미' 논고에 의하면 오대산 사고의 의궤는 1922년 일본 궁내성(현 궁내청)으로 반출됐다.
당시 의궤를 비롯해 왕실 도서 105종 1천205책이 고국을 떠나야 했다.
조선총독부는 총 79종의 의궤를 선별해 기증 형식으로 반출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상의 절반이 넘는 43종을 오대산 사고본으로 구성했다고 박 학예연구관은 전했다.
그러던 중 2006년 '조선왕실의궤 환수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오대산 사고본을 국내로 들여와야 한다는 반환 논의에 불을 댕겼고, 2008년과 2010년에 열린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이 문제가 거론되기도 했다.
기나긴 논의 끝에 오대산 사고본 의궤가 돌아온 건 2011년 12월이었다.
숱한 어려움 속에 돌아온 실록과 의궤는 학술·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여겨진다.
박수희 학예연구관은 "오대산 사고는 임진왜란을 겪으며 국가와 왕실의 중요한 기록을 지켜야한다는 절박함 속에 세워졌고, 그런 노력으로 500년이 넘게 지속된 단일 왕조의 기록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박 학예연구관은 "오대산 사고본은 우리 역사의 굴곡 속에서 문화유산이 겪은 수난을 형형히 보여줘 우리에게 큰 감동과 교훈을 주는 무형적 가치를 지닌다"고 덧붙였다.
ye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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