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굴에 끼워넣듯 지은 ‘신선의 놀이터’… 섬진강 끼고 앉아 만추 즐긴다[박경일기자의 여행]
옛지방도로 ‘모래재’ 타고 가면
메타세쿼이아 줄지어 늘어서
늦가을~초겨울 단풍 정취 흠뻑
기이한 ‘마이산’ 인근 강정리엔
바위동굴 속 파격적인 ‘수선루’
자연의 일부인 듯 신비한 느낌
또다른 바위벽의 정자 ‘쌍계정’
백운천변 수직암벽 옆 ‘만취정’
고개 들면 물길… 詩 절로 읊어
성수면 비석 ‘신도비’ 주인공은
장화홍련 원한 풀어준 실존인물
구봉산 ‘천황사 전나무’는 탄성
진안=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 모래재, 늦가을에 가장 아름다운 길
늦가을에 전북 진안에 간다면 옛 지방도로 ‘모래재’를 넘어서 가자. 모래재는 가을이 오래 머무는 길이다. 익산∼장수 고속도로를 이미 탔다면, 진안나들목으로 바로 들어가지 말고, 소양 나들목쯤에서 미리 완주 땅에 내려선 뒤에 모래재를 넘자.
모래재는 전북 완주 소양면에서 진안 부귀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진안 쪽 고개 밑 소양면 신촌리에 모사골이란 계곡이 있는데, ‘모사’를 모새(모래)로 발음하다 고개 이름이 ‘모래재’가 됐다. ‘모사골 넘어가는 고갯길’이 모래재가 된 것이다. 지금, 이 고개가 가을로 흠뻑 물들어 있다.
전주와 진안을 잇는 모래재 고갯길은 1972년 놓였다. 그 이전에 전주와 진안 사이에는 ‘곰티재’가 있었다. 1912년에 닦은 고갯길이다. 굽이가 심한 데다 경사도 급했고, 그늘 구간도 많아 겨울에 눈이라도 내리면 잘 녹지 않았다. 이 길에서 1966년 6월 6일, 대형 교통사고가 났다. 진안에서 전주로 가던 완행버스가 곰티재 고개에서 140m 아래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졌다. 승객 15명이 죽고, 54명이 다친 참사였다.
곰티재 사고 후 6년여의 공사 끝에 모래재가 새로 놓였다. 길을 눕히고 가파른 정상 부근에는 짧은 터널까지 뚫었지만, 그래도 길은 여전히 험했다. 1989년 9월 모래재에서 다시 한번 대형 교통사고가 났다. 모래재를 넘던 버스가 100m 절벽 아래로 추락한 것. 마침 추석 연휴라 출퇴근길 만원 버스 수준으로 손님을 태우고 있었으니 인명피해가 컸다. 이날 사고로 26명이 죽고, 55명이 다쳤다.
#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가을로 물들다
곰티재 사고로 모래재길이 뚫렸던 것처럼, 모래재 사고가 나자 새 길이 놓였다. 1997년에 개통된 ‘보통재’를 넘는 4차선 26번 국도다. 모래재가 놓이자마자 곰티재는 사라졌지만, 보통재가 열린 뒤에도 모래재는 사라지지도, 잊히지도 않았다. 모래재 고갯길에 심은 가로수 덕분이었다.
모래재를 놓으면서 심은 가로수가 한 해 한 해 자라며 운치를 더해갔던 것. 차량통행이 크게 줄어들면서 호젓해진 길은 잘 자란 가로수들로 오히려 ‘멋진 길’이 됐다. 길이 그려내는 유연한 곡선과 도로변에 심은 가로수의 아름다움은, 모래재가 분주했을 때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모래재가 가장 근사한 때는 딱 지금이다. 완주 쪽 모래재는 단풍나무가 터널을 이뤘고, 진안 쪽 모래재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둘 중 압권은 진안 쪽 모래재의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다. 모래재의 메타세쿼이아는 가을의 끝에서 초겨울까지 늦은 단풍의 정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이라면 전남 담양을 먼저 떠올리는데, 나무의 크기나 수령은 담양 쪽이 낫지만 아기자기한 맛은 여기 진안 모래재의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이 낫다. 가로수 길의 폭이 좁고 경관의 중심이 낮아 집중도가 높기도 하고, 호젓한 분위기와 유연한 고갯길의 비밀스러운 느낌도 훌륭하다. 무엇보다 다른 건, 이 길에는 길을 막고서 입장료를 징수하는 담양 메타세쿼이아 길의 장삿속이 없다는 것이다. 만추의 계절에 이 길로 진안에 들어섰다면, 진안 여행의 반은 성공이다.
# 진안을 소요하다… 정자 구경
진안 서쪽 지역은 자갈로 이뤄진 퇴적암인 ‘역암(礫岩)’으로 이뤄져 있다. ‘자갈 역(礫)’자를 쓰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역암은 ‘자갈이 박혀 있는’ 바위다. 시멘트에 자갈을 넣고 이겨 반죽한 뒤 굳힌 것처럼 보인다. 대표적인 역암 지형이 진안을 대표하는 명소 마이산이다. 진안에 여러 번 갔다 해도 마이산은 꼭 들러야 하는 곳. 따로 이야기를 보태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이름난 곳이니 이번에는 마이산 얘기는 꺼내지 않기로 한다. 그렇다고 마이산을 가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올가을 마이산 단풍 색이 여느 해보다 훨씬 더 곱고 선명하다.
역암 표면에는 자갈이 빠져나가면서 움푹 파인 구멍이 곳곳에 있다. 벌집만 한 것에서부터 큰 동굴 크기쯤 되는 것까지 다양하다. 이걸 ‘타포니’라 부른다. 마이산의 형상이 기이하게 느껴지는 건, 산의 전체적인 생김새도 그렇지만 가까이 가보면 바위표면에 수많은 구멍, 그러니까 타포니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진안에는 이런 지형을 활용해 지은 멋진 정자들이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의 정자가 있다. 진안에서 정자를 찾아가는 여정을 제안하는 이유다. 진안의 정자 가운데 가장 파격적인 것이 마령면 강정리 월운마을의 수선루(睡仙樓)다.
수선루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암굴에 만들어진 정자다. 타포니를 활용해 바위 동굴 안에다 끼워 넣듯 지었다. 조선 숙종 때인 1686년에 연안 송씨 집안 4형제가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들이 바둑도 두고 시도 읊으면서 신선처럼 지내라는 뜻으로 세웠다고 전한다. 그런데 정작 정자를 누렸던 건 아버지가 아니라 4형제였다. 형제들은 팔순이 다 되도록 우애를 돈독히 하며 정자를 드나들면서 풍류를 즐겼다.
# 흰 수염의 신선, 정자에 깃들이다
현판에 걸어놓은 ‘잠잘 수(睡)’에 ‘신선 선(仙)’이란 이름은, 당시 도지사쯤의 벼슬을 했던 이가 지어준 것. 그가 현판 이름으로 가져다 쓴 ‘신선’의 모델이 중국 역사서 ‘사기’에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중국 진나라 말기 전란을 피해 협서성 상산(商山)에 은거한 동원공(東園公),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 기리계(綺里季)가 등장한다. ‘네 명의 신선’이라 불리던 이들은 모두 머리와 수염이 희어서 ‘흴 호(皓)’자를 써 ‘상산사호(商山四皓)’로 불렸다.
송씨 4형제도 이들처럼 머리와 수염이 희었던 것일까. 수선루 곳곳에는 민화풍의 그림이 잔뜩 그려져 있다. 대들보 왼쪽 위 벽면에 바둑을 두고 있는 선비 4명이 그려져 있는데 모두 흰 수염이 덥수룩하다. 기이한 바위 동굴에다 더 기이하게 지은 수선루에 흰 수염의 노인 넷이 드나들었으니, 신선을 떠올리는 건 당연했으리라.
수선루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전혀 느낌이 다르다. 격식을 앞세우면 변칙적인 양식이 어쩐지 부족한 것처럼 보이지만, 건축적 상상력에 주목하면 창의와 파격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자연암반을 그대로 살려 역암의 동굴에 끼워 맞추듯 지어낸 정자에서 느껴지는 건 ‘자연과의 일체’다. 수선루는 2019년 보물로 지정됐다. 늦다면 늦은 보물 지정이다. 그래도 수선루는 섬진강 변의 정자를 통틀어 유일한 보물이다.
수선루는 보물이지만, 문을 활짝 열어뒀다. 누구든 수선루 마루에 올라앉아 섬진강 물길을 내다볼 수 있다. 보물을 마치 제 것처럼 누리는 경험이다. 누리는 재미 못잖게 ‘보는’ 재미도 있다. 누각의 뒤쪽 바위에 옛 선비들이 새긴 글귀를 찾거나 누각 안에 투박하게 그린 산수화와 민화, 문양 등을 짚다 보면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듯하다.
# 늙은 뒤에야 헛되이 알게 되는 것
수선루에서 차로 10분이 채 안 걸리는 마령면 강정리에도 바위 사이에 끼워 넣어 지은 기이한 정자가 있다. 쌍계정(雙溪亭)이다. 둘 다 ‘바위 동굴에 끼워 넣어 지었다’고 할 수 있지만 쌍계정은 수선루와 형태가 사뭇 다르다. 수선루가 동굴 안에 몸을 숨기듯 지어졌다면, 쌍계정은 바위가 마치 거대한 짐승처럼 정자를 이로 물고 있는 듯한 형상으로 지어졌다.
쌍계정은 섬진강을 끼고 있는 바위벽의 동굴 안으로 몸을 절반 넘게 밀어 넣어 지은 정자다. 정자는 진안의 선비 오도한이 1886년에 지었는데, 정자를 짓기까지 자그마치 30년의 다짐과 준비가 있었다. 오도한은 1856년 고을 선비들과 함께 지리산 쌍계사 앞에 있는 고운 최치원이 남긴 ‘쌍계석문(雙溪石門)’이란 네 글자를 따다가 훗날 쌍계정이 들어설 바위 동굴 안에 새겼다. 그 일을 함께 도모한 선비들의 이름도 바위에 새겼다. 그 자리에다 훗날 ‘정자를 세우겠다’는 뜻을 새긴 것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정자는 30년 세월이 지나고 쉰아홉 나이가 돼서야 지을 수 있었다. 그의 과거 합격은 늦어도 너무 늦었다. 진사시에 합격한 나이가 쉰일곱. 벼슬길에 나서기는커녕 은퇴할 나이에 가까웠다. 급제 후에도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은둔했던 그는 입을 딱 벌린 바위에 밀어 넣듯 정자 쌍계정을 지었다.
쌍계정에는 우국지사 매천 황현의 발길이 새겨져 있다. 거의 평생을 섬진강을 끼고 살았던 그가 강을 거슬러 진안까지 올라와 쌍계정을 찾은 것이었다. 쌍계정 주인 오도한이 세상은 뜬 지 2년 뒤의 일이다. 매천이 쌍계정을 다녀와서 지은 시가 ‘매천집’ 제5권에 실려 있다.
“붉은 바위 서린 곳 벽옥 같은 물 흘러와 / 두 냇물이 합쳐져 작은 모래섬 이루었네. / 겹겹 산중엔 길 있어도 어딘지 모르겠고 / 한 버들과 단풍엔 가을 기운 끝이 없네. / 지팡이 소리에 놀란 박쥐들 흩어지고 / 난간에 기댄 그림자에는 게들이 떠오르네. / 잘 알겠네, 절경이 평범한 데 있는데도 / 오악 구경 다니느라 헛되이 늙었음을.”
헛되이 늙은 뒤에야 알게 되는 것이 어디 가까이 있는 아름다움뿐일까. 그가 쌍계정을 찾았던 때도 지금처럼 가을이 깊어가는 무렵이었다. 매천이 이 시를 남긴 때는 한·일병합 조약체결에 통분해 절명 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기 두 해 전의 일이었다.
# 바위 위의 두 정자…만취정과 쌍벽루
쌍계정 근처의 백운천변에 ‘만취정(晩趣亭)’이 있다. 쌍계정에서 직선거리로 400m가 채 안 되는 가까운 거리다. 진안에는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정자들이 여럿 있다. 진양 하씨의 5형제가 함께 지었다는 만취정의 내력은 100년 남짓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의 정자 건물은 1970년에 고쳐 지은 것이다.
만취정은 시루봉 아래 천변의 수직 암벽에 등을 대고 아슬아슬 올라서 있다. 정자 발끝 벼랑 아래로는 섬진강 상류인 백운천 물길이 흐른다. 딛고 선 자리는 훌륭한데, 정자는 퇴락해 금방이라도 스러져버릴 듯하다. 정자까지 가는 길마저 끊어져서 찾을 수 없다. 백운천 물길 건너편 둑에서 발돋움해 건너다보며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쌍계정에서 다시 백운천 물길을 따라 수선루 쪽으로 되돌아가 보자. 수선루 못미처 마령면 강정리가 있다. 강정리는 마을 가운데로 물이 흘러 강창리(江昌里)라 부르다가 몇 차례 큰 수재를 겪은 뒤 ‘강정(江亭)’이라 마을 이름을 고쳤다. ‘강 강(江)’자 뒤에 ‘창성할 창(昌)’자 대신 ‘정자 정(亭)’자를 써서 ‘강에 있는 정자’를 이름으로 삼으면 행여나 마을이 물에 잠기는 일이 줄어들까 싶어서였다.
마을 이름을 따서 깎아지른 직벽의 바위에 붉은 글씨로 ‘강정대(江亭臺)’라 써놓았는데, 그 바위 위에다 1942년 참봉벼슬을 했던 이가 누각을 지어 올리고 ‘쌍벽루(雙碧樓)’란 편액을 걸었다. 누각 안에서 눈길을 끄는 건 나무로 깎아 대들보에 얹은 황룡과 청룡. 천장에서 용 두 마리가 두 눈을 부릅뜨고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예전에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누각에서 바깥을 보는 경치보다 바위 아래에서 암벽 위의 누각을 올려다보는 쪽이 훨씬 더 근사하다.
쌍벽루 아래 주차장 옆에 ‘삼계석문(三溪石門)’이란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조선 선조 때인 1590년에 신라 최치원의 글씨를 탁본해 새겼다. 쌍계정의 ‘쌍계석문’ 글씨와 마찬가지로, 삼계석문도 최치원이 태산 군수를 지냈다는 이 지역에서 그를 흠모하며 후대에 새긴 글로 추정된다.
# 효심으로 5만 명의 목숨을 구하다
백운면 노촌리에는 상표천 물길을 굽어보는 자리에 들어선 근사한 정자 ‘영모정(永慕亭)’이 있다. 효자 신의련을 기리기 위해 후손이 지은 정자다. 효자각에다 정려각까지 세워져 있으니 명나라까지 알려졌다는 신의련의 효행은 의심할 바 없겠지만, 기록으로 남아 있는 효행의 사례는 온통 과장 일색의 진부한 스토리다. 부모에게 드릴 음식을 구하러 사냥을 나간 길에 꿩이 제 발로 찾아오고, 얼음 속에서 잉어가 나오고, 눈 속에서 죽순을 발견했다는 식이다.
효행의 압권은 임진왜란 때 왜적이 쳐들어와 아버지를 죽이려 하자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간곡히 애원했다는 얘기다. 이를 본 왜장이 효심을 시험하려 “손가락을 깨물어서 ‘효자 신의련’이라 써보라”고 하자 그 자리에서 혈서를 써서 건네줬다. 왜장이 혈서에 불을 붙였는데, 종이만 타버리고 타지 않은 글자가 하늘로 올라가자 동구 밖에 ‘효자가 사는 곳이니 왜군은 이곳을 해(害)하지 말라’는 푯말을 세우고 물러갔다고 전한다.
왜군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인근 백성 5만 명이 여기로 피란을 와서 전쟁통에 목숨을 건졌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이런 연유로 이곳 마을을 5만 명이 목숨을 건진 곳이라 ‘오만동(五萬洞)’이라 불렀으며, 인근 들판은 화를 면한 곳이라 해서 ‘면화평(免禍坪)’, 남쪽의 솟은 산은 큰 덕이 된 곳이란 뜻에서 ‘덕태산(德泰山)’이 됐단다.
영모정에서 내다보는 계곡 풍경은 촬영 세트장 같다. 계곡 바깥과 안쪽이 분위기가 달라서 마치 다른 차원의 공간처럼 느껴진다는 얘기다. 영모정에서 좀 더 위쪽으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물 건너편에 또 다른 정자 미룡정(美龍亭)이 있다. 이 정자 역시 신의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미룡정 주변으로도 높은 산중의 깊은 골짜기에 들어온 듯 수려한 풍경이 펼쳐진다.
# 장화 홍련과 늠름한 전나무, 그리고 단풍
정자 말고도 진안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새겨진 볼거리들이 제법 많다. 성수면의 신기리의 전동흘 신도비도 그중 하나다. 신도비는 무덤 앞에 세운 비석. 비석에는 죽은 이의 신상이나 사적을 적었다. 전동흘은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조선 후기 무관. 흥미로운 건 그가 ‘장화홍련전’에서 장화와 홍련의 원한을 풀어준 실존인물이라는 것이다. 장화홍련전은 그가 평안북도 철산부의 부사(지금으로 치면 도지사)로 재직하던 시절의 실화다.
청천면 구봉산 아래 적막한 절집 천황사도 꼭 들러보자. 천황사 주변에는 아름드리 거목들이 활개 치듯 가지를 뻗고 자란다. 절집 옆에는 수간이 잘려나간 거대한 둥치의 전나무가 있고, 절집 마당 한쪽에는 잎을 다 떨군 은행나무 노거수가 펜화로 그린 그림처럼 서 있다. 이 정도로 천연기념물 전나무는 절집에서 300m쯤 떨어진 암자 남암 앞에 있다. 남암은 말이 암자지 함석으로 지붕을 이은 토굴에 가깝다. 암자 앞 전나무는 보는 순간 탄성을 터뜨릴 정도로 압도적이다. 키가 35m가 넘는 데다 둥치도 굵고 수형도 빼어나다. 나무 한 그루가 이토록 장엄하고 늠름하다.
가을 진안에서 또 한 곳 빠뜨릴 수 없는 곳이 있다. 구량천 물길을 따라 섬계교를 건너 천반산 휴양림을 지나고 상전면사무소까지 이어지는 49번 지방도로다. 이 구간에 줄지어 가로수로 심어놓은 단풍나무들이 지금 온통 붉은 터널을 이루고 있다. 49번 국도 성수면사무소에서 임실 사선대로 이어지는 구간의 도로 주위에도 지금 단풍의 붉은 빛으로 낭자하다. 내장산 단풍이 영 예년만 못하지만, 여기 진안은 올해 단풍색이 유독 진하고 선명하다.
■ 지질명소 전망대
진안은 무주와 한데 묶여서 2019년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됐다. 우리나라에서 열한 번째다. 진안의 지질명소는 마이산을 포함해 모두 5곳. 마이산이야 두말할 필요 없는 곳, 천반산과 죽도의 경관도 근사하다. 수직 절벽과 물길을 두르고 있는 오메가(Ω) 형태의 지형이 독특하다. 동향면 장전마을회관에서 죽도교로 가는 49번 지방도로 고갯길 옆에 지질명소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데, 안내판을 따라 500m 정도만 걸으면 천반산과 죽도 일대의 장쾌한 전망이 한눈에 들어오는 직벽 위 전망대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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