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 엄마’ 위로 받은 이 말 “너무 애쓰지마, 나도 그랬어”
“너무 애쓰지마. 너 힘들 거야. 모든 걸 다 해주고도 못 해준 것만 생각나서 미안해질 거고, 다 니 탓 할 거고 죄책감 들 거야. 네가 다 시들어가는 것도 모를 거야. 네 인생이 전부 노란색일 거야. 노란불이 그렇게 깜빡이는데도 너 모를 거야. 아이 행복 때문에 네 행복에는 눈감고 살 거야. 근데 네가 안 행복한데 누가 행복하겠어.”
넷플릭스 시리즈물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서 우울증으로 입원한 ‘워킹맘’ 하윤 엄마는 또 다른 워킹맘인 병동 간호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바로 전까지 유치원에 다니는 딸을 맡길 곳을 찾아 업무 중간마다 통화를 해야 했던 간호사는 이 말에 눈물을 흘린다. 위로의 순간이었다.
프리랜서 작가 김수미(37)씨는 25살에 출산을 한 뒤 우울증을 경험한 친구를 위로하지 못했다. 친구는 육아하다가 갑자기 너무 화가 나 냉장고를 향해 토마토를 던졌다고 했다. 육아의 고립감도, 몸이 축나는 돌봄 노동도 당시 김 작가에겐 현실로 다가오진 않았다.
‘엄마 우울’이 제 일로 다가온 건, 몇 년 뒤 첫 아이를 낳고 나서다. 젖몸살로 진통제를 먹어가며 딸에게 젖을 먹이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육아 탓에 쪽잠 자기 일쑤였고, 숨구멍은 없었다. 몇 년 뒤 쌍둥이가 태어난 뒤엔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세 아이 육아를 온전히 전담하면서 돌봄과 가사 부담이 커졌어요. 설상가상 코로나 19까지 발생해 집에서 세 아이를 돌봐야 했죠. (아이 뛰는 소리에 시끄럽다고) 층간 소음과 벽간 소음으로 항의를 받다가 두번이나 이사를 가야 했고요.”
돌봄 부담에 글 쓸 짬도 나지 않았다. 남편보다 벌이가 적으니, 집안일은 자신이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등바등하며 육아와 가사에 매달렸지만 세상엔 ‘집에서 살림하는데 뭘 (힘드냐)’하는 말들이 넘쳐났다. 아이가 아파 병원이라도 가면 ‘뭘 (잘못) 먹였냐’ 같은 타박이 돌아왔다. 아이가 아픈 것도, 집안일을 능숙하게 해내지 못하는 것도 모두 ‘내 탓’ 같았다. 김씨는 “우울 증상이 심각해지면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도 힘들어지는데, 그럼 죄책감이 더 들죠. 좋은 엄마가 아니기 때문에 아이를 방치한다는 생각도 들어요”라고 말했다.
남편과 엄마, 친구들에게 힘들다고 이야기했지만 누구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아이들은 건강하고, 집도 안정적인데 ‘팔자 좋은 소리’라는 것이었다. “죽음을 구체적으로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나서야, 남편이 심각하게 받아들이더라고요. 직장인은 회사 일로 번아웃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엄마의 번아웃은 이해받지 못하는 것 같아요.”
김씨는 스스로 병원을 찾아 3년 전부터 우울증약을 복용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해 말, 경상남도 창원에서 자신과 똑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엄마들과 모임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우울한 엄마들의 살롱’(우살롱)이란 이름으로 신문에 모임 광고도 내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도 알렸다.
“우울하다는 감정은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기 쉽지 않잖아요. 특히 우울한 엄마가 키우는 자녀를 (딱하게) 보는 타인의 시선 때문에 우울하다고 말하기가 더 쉽지 않아요. 지역 육아 카페만 가봐도, 우울하다는 이야기는 익명 게시판에 올라와요. 그래서 저랑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자고 생각했어요.”
‘우살롱’ 모임은 지난해 12월 시작됐다. 첫 만남의 긴장도 잠시, 공간은 울음으로 채워졌다. 엄마들은 자신이 왜 우울한지, 언제 우울한지 쏟아냈다. “남편·가족조차 우울함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많았어요. 이 모임에 간다고 남편에게 말했더니 ‘그런데 왜 나가냐, 메갈(남성을 무조건적으로 혐오하는 여성이냐는 멸칭)이냐’는 말을 들은 분도 있었고요.”
모임에 나온 엄마들은 저마다 다른 사연들을 털어놓았지만, 곱씹어 보면 모두 같은 이야기를 했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는 모성신화에 휘둘리고, 집안을 깔끔하게 유지하고, 아이를 잘 돌보고, 남편 내조도 잘하는 등의 사회적 역할도 강요받았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엄마의 노동은 비생산적이라고 깎아내려졌고 ‘맘충’이라고 싸잡아 모욕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설거지 밀리면 곰팡이 피고, 인체에 (나쁜) 영향을 끼치잖아요. 그런데 저조차도 ‘누가 오늘 뭐 했냐’고 물어보면 ‘그냥 집에서 설거지하고 청소했지’라고 말하고 있더라고요. 돌봄의 가치가 후려치게 되고 있는 거죠.”
모임에선 그저 듣고 공감한다. 우살롱 멤버들은 누군가 ‘죽고 싶다’는 말을 할 때, ‘엄마가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하냐’ ‘그러면 안 된다’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나도 그런 적 있다’며 담담히 자기 경험을 이야기한다. 김씨는 “한번 모이면 2시간가량 진행되는데, 모임이 끝나도 다들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린다”며 “모임 초반에는 많이 울었는데, 나중엔 좀 덜 울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우울한 감정을 나누는 엄마들의 모임은 여성 노동, 지역 소멸, 지역 노동 같은 다양한 이슈로 뻗어 나가고 있다. “우살롱을 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요. 기혼 여성이 일하기 힘든 도시는 젊은 여성과 젊은 남성도 일하기 힘들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노동 문제, 지역 문제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우살롱은 9번의 모임으로 시즌1을 마무리하고, 참여 대상을 엄마에서 ‘여성’으로 확장해 지금은 시즌2로 운영되고 있다. 김씨는 최근 자신과 우살롱의 이야기를 담은 ‘우울한 엄마들의 살롱’이라는 책도 발간했다. “책 표지에 ‘저처럼 우울한 엄마들이 진짜 있나 궁금해서 왔어요’라는 말이 적혀 있는데, 모임에서 나왔던 말이에요. 우살롱은 유토피아는 아니지만, 위로받을 수 있는 공간이니 맘 편히 오셨으면 좋겠어요.”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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