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대신 척수에 전기 자극… 30년 파킨슨병 환자가 걸었다
파킨슨병은 1817년 영국 의사 제임스 파킨슨이 처음 발견해 그의 이름이 붙었다. 뇌의 도파민 신경세포가 줄어들면서 느린 운동, 정지 시 떨림, 근육 강직 등이 점차 심해지는 신경 퇴행성 질환으로 근본적인 치료법은 아직 없다. 도파민이 부족한 뇌 영역에 약물을 투여하거나 전류를 흘리는 식으로 증상 진행을 늦추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병이 많이 진행되면 이마저 효과가 없다. 미국에서만 매년 100만명이 넘는 파킨슨병 환자가 발생하고, 한국에서도 지난해 기준 12만명을 넘어섰다. 1000명당 약 2명이 질환을 앓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60세 이상은 약 1%, 65세 이상은 약 2%가 앓는다. 환자들은 운동 능력이 소실되면서 결국 누워서 생활하게 되고 장기까지 서서히 움직임이 줄어들기 때문에 사회적 비용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김영수 연세대 약대 교수는 “치매와 마찬가지로 파킨슨병은 서서히 희망을 앗아가는 질병”이라고 했다.
파킨슨병 환자의 보행 능력을 개선한 스위스 로잔 연방공대 그레구아르 쿠르틴 교수와 로잔대학병원 조슬린 블로크 교수 공동 연구팀의 성과는 파킨슨병의 근원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진행된 증상을 되돌리는 것이 불가능했던 파킨슨병 환자들에게 상당 기간 삶의 질을 유지할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척수에 전기 자극을 주는 방식은 사지마비 등 다른 신경 장애에도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3개월 만에 재활 성공
연구팀은 파킨슨병 환자에게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지금까지 연구는 환자의 운동 능력을 되살리기 위해 주로 뇌를 자극했다. 인체의 명령 체계를 손보려 한 것이다. 하지만 공동 연구팀은 직접적으로 운동을 담당하는 척수에 주목했다. 연구팀은 영장류 실험을 통해 먼저 전기 자극의 강도와 형태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 신경 다발인 척수는 각 가닥이 다른 신체 부위의 운동을 관장하는데 문제가 되는 부위에 정확하게 전기 자극을 주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어느 정도 노하우가 쌓이자 연구팀은 2021년 환자 마크 고티에의 다리와 신발에 센서를 부착한 뒤 데이터를 모았다. 다리가 얼어붙듯이 굳는 현상이 언제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확인해 어떤 전기 자극이 필요한지 확인했다. 고티에의 경우 앞에 누가 지나가거나 길이 좁아지는 경우, 전방에 장애물이 있는 경우에 얼어붙는 현상이 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이어 고티에의 요추 부분에 전극 보형물(임플란트)을 이식하고 전기 자극을 줬다. 연구팀은 “고티에의 뇌가 다리에 운동하라는 신호를 보내면 요추에 이식한 전극이 전기 신호를 추가해 전달하면서 다리가 더 부드럽게 움직이도록 한다”고 했다.
고티에는 한쪽 다리의 보행 장애가 더 심한 특징이 있었다. 연구팀은 임플란트를 조정해 더 불편한 다리에 강한 전기 자극을 주면서 양쪽 다리 운동의 균형을 맞췄다. 고티에는 수술 후 3개월간 전기 자극에 익숙해지며 보행 재활 훈련을 거쳤고 그 결과 얼어붙는 현상이 거의 사라졌다. 2년이 지난 지금은 보조자나 지팡이 없이 걸을 수 있고 일요일마다 호숫가를 6㎞씩 걷고 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도 문제가 없이 하루 평균 8시간씩 움직인다. 연구팀이 고티에의 보행을 분석한 결과 파킨슨병 환자보다는 일반인과 흡사했다.
◇마이클 제이 폭스 재단이 지원
고티에는 현재 어른 새끼손가락 하나 정도 크기 임플란트를 삽입한 채 생활하고 있다. 이 임플란트는 고티에의 피부 아래 이식된 자체 전원 공급 장치를 갖춘 전기 발생기에 연결돼 있다. 그는 “아침에 임플란트를 켜고 저녁에 끄고 있다”면서 “장치가 켜져 있을 때 약간의 따끔거림을 느끼지만 신경이 쓰이는 정도는 아니다”라고 했다.
이번 연구는 할리우드 유명 배우 마이클 제이 폭스가 세운 재단이 자금을 지원했다. 백 투 더 퓨처 등으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폭스는 30세에 파킨슨병 증상이 나타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우 생활을 접었다. 이후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세워 전 세계의 파킨슨병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 연구팀은 추가 기술 연구가 필요하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쿠르틴 교수는 “아직 한 사람에게서만 입증된 이 기술이 보편화되려면 최소 5년 이상의 기술 개발과 임상시험이 필요하다”고 했다. 연구팀은 마이클 제이 폭스 재단에서 받은 기부금 100만달러로 내년 환자 6명에게 추가로 임상을 진행할 계획이다. 영국 파킨슨병 연구 책임자인 데이비드 덱스터는 “이번 기술은 약물이 더 이상 효과를 내지 못하는 파킨슨병 환자가 움직임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판도를 바꾸는 기술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하반신마비 환자 걷게 한 연구팀
쿠르틴과 블로크 교수 공동 연구팀은 재활에 척수를 이용하는 분야의 최고 권위자다. 사고나 질병으로 사지 또는 신체 일부가 마비된 환자들에게도 희망이 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연구팀은 지난 5월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뇌와 척수 사이의 통신을 회복시켜 하반신마비 환자가 자연스럽게 일어서고 걸을 수 있게 했다”고 밝혔다. 40세 네덜란드 남성 헤르트-얀 오스캄은 2011년 교통사고로 목뼈 신경이 손상돼 허리 아래가 마비됐다. 뇌와 척수 간 통신이 차단된 것이다. 연구팀은 환자의 뇌에 전극을 이식한 뒤 뇌파의 의도를 읽어 척수에 달린 전극으로 무선 전송했다. 이 과정을 반복하자 환자는 보조 장치의 도움을 얻어 혼자 일어나거나 걸을 수 있었다. 연구팀은 뇌파 해독 및 전송 기술이 더 발달하면 사지마비 환자가 움직이는 일도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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