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핵·재래식 무기 ‘판도라의 상자’ 열렸다
러시아가 7일(현지 시각)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체결했던 유럽재래식무기감축조약(CFE)에서 33년 만에 완전 탈퇴했다. 이 발표 직후 나토도 해당 조약 효력을 중단시켰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형성된 신냉전 구도가 고착화되면서 과거 냉전 시대 체결돼 세계 질서의 안전판 역할을 하던 주요 군축 조약들이 잇따라 무력화되자 군비 경쟁이 격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러시아 외무부는 이날 “CFE 탈퇴 절차가 완료됐다”고 발표하면서 “오늘부로 러시아와 나토 회원국 간 어떤 (재래식 무기) 군축 협정도 불가능하며, 이 문서는 우리에게 역사가 됐다”고 했다.
CFE 조약은 1990년 나토와 소련 주도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의 안보 동맹체인 바르샤바조약기구 간에 체결됐다. 어느 한쪽이 신속히 병력을 늘려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을 막고자 재래식 무기를 전차(2만대), 전투기(6800기), 공격 헬기(2000기), 장갑차(3만대), 대포(2만문) 등 다섯 범주로 나눠 보유 수량에 제한을 두고, 상대 진영에 보내 보유 현황을 의무 검증하도록 했다. 소련 붕괴·바르샤바조약기구 해체·동유럽 국가들의 나토 합류 등 격변 속에서도, 조약은 소련을 승계한 러시아와 나토 진영 간의 긴장 고조를 제어해주는 안전판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집권 후 군사 강국 재건을 꾀하는 러시아와 이를 제어하려는 나토 관계가 갈수록 악화하면서 조약도 흔들렸다. 결국 러시아는 2007년 조약 참여 중단을 선언했고, 2015년에는 자문 그룹에서도 탈퇴하면서 사실상 사문화됐다. 이후에도 러시아는 명목상 조약 당사국이었는데 이마저도 뿌리치고 완전히 탈퇴한 것이다.
나토는 “러시아의 탈퇴는 유럽·대서양 안보를 훼손하는 행동들 중 가장 최근 사례”라고 비난했다. 나토 회원국 미국도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별도 성명을 통해 “러시아가 CFE에서 탈퇴하고 CFE 당사국인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략 전쟁이 계속되면서 상황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고 비판했다. CFE에 앞서 냉전 시기 체결된 군축 조약이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주도로 줄줄이 무력화되는 양상이다. 푸틴은 지난 2일 어떤 경우에도 핵실험을 금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 비준 철회 법안에 서명했다. 미국 등 일부 국가가 비준을 완료하지 않아 발효되지 않은 상태에서 러시아의 완전 이탈로 CTBT 앞날은 더욱 불투명해졌다.
러시아는 지난 2월에는 미국과 체결한 유일한 양자 간 핵 통제 협정인 신전략무기감축협정(뉴스타트) 참여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반면 미국이 군축 조약을 먼저 깬 사례도 있다. 1987년 선제공격용 중·단거리 미사일을 감축·철수하는 내용으로 러시아(당시 소련)와 맺었던 중거리핵전력(INF) 조약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인 2019년 선제 탈퇴했다. AP통신은 “최근 몇 년 동안 미·러가 관련된 여러 주요 군비 통제 조약이 차례로 무력화된 것은 군사 충돌을 막을 ‘가드레일’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라며 “군비 경쟁이 심각한 수준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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