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에게 60·70년대는 ‘제2의 6·25′

김민서 기자 2023. 11. 9.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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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동맹 70년, 번영을 위한 동행] [17]

1977년 7월 3일 북한 김일성 주석은 일본 언론에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하며 미국을 향해 “남조선에서 공군도 지상군과 함께 철거하라”고 했다. 그로부터 약 열흘 뒤인 7월 14일 로버트 하인스 하사 등 미군 장병 3명이 타고 있던 육군 CH-47 헬기가 북한군의 대공포 공격에 격추됐다. 비무장지대(DMZ)에서 작전 중 비행착오로 군사분계선을 넘는 바람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항공기 탑승 장병 3명은 북한군이 쏜 대공포에 맞아 전사했고 조종사는 북한에 57일간 억류된 뒤 송환됐다.

블링컨 美 국무장관 방한 -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8일 저녁 오산 공군기지에 도착해 전용기에서 내리며 손을 흔들고 있다. 블링컨 장관이 한국을 찾은 것은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처음이다. 그는 9일 박진 외교부 장관과 회담을 갖는다. 윤석열 대통령 예방과 조태용 국가안보실장과의 만남도 예정돼 있다. /연합뉴스

주한미군 장병들 사이에서 1960·70년대는 ‘제2의 6·25전쟁’ 시기로 불린다고 한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에도 북한군의 국지 도발은 멈추지 않았다. DMZ 인근에서 복무한 주한미군 101명이 북한군의 매복 총격, 지뢰 매설, 전투기 공격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이런 희생 대부분은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1976년 8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에게 살해당한 ‘도끼 만행 사건’ 정도가 예외다. 예비역 육군 소장인 신경수 한미동맹재단 사무총장은 8일 “1970년대 초반까지는 우리 군의 역량이 부족한 시기여서 주한미군이 DMZ를 지켰다”며 “37년 군 생활을 한 나도 전사자 확인 작업을 하기 전까지 6·25 이후에도 주한미군이 북한군 공격에 이렇게 많이 전사한 줄 몰랐다”고 했다.

정전 이후 DMZ에서 처음 전사한 주한미군 장병은 찰스 브라운 대위다. 1955년 8월 17일 그가 타고 있던 훈련기가 북한 항공포대에 격추당했다. 당시 해당 훈련기 조종사는 부상으로 북한군에 포로로 붙잡힌 뒤 엿새 만에 송환됐다. 북한 김일성이 8·15 해방 10주년 경축대회 연설에서 조국 통일 문제를 논의하자며 남북 대표자회의 개최를 제의한 지 이틀 뒤 벌어진 일이었다. 1961년엔 훈련용 비무장 전투기를 조종하던 병사가 DMZ를 이탈해 북한 온진 지역 근처에서 북한군 미그기 2대 공격으로 비상착륙 중 추락해 숨졌다.

1955년 1명을 시작으로 1960년대에 92명, 1970년대에 7명이 전사했다. 김일성이 우리 당국과 통일 문제 협상 용의를 표명한 1967년에만 17명이 전사했다. 1960·70년대는 DMZ 철책이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시절이어서 북한군이 수시로 침투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주한 미군 장교 2명을 북한군이 도끼를 휘둘러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조선일보 DB

1962년 일병과 소위 등 미군 장병 3명이 DMZ 경계근무 도중 북한군의 경기관총 사격과 수류탄 공격에 숨졌다. 같은 해 DMZ 경계근무를 서던 병사는 북한군으로부터 머리에 총상 4발, 가슴에 8번의 흉기 공격을 당해 전사했다. 1963년엔 DMZ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장병 3명이 북한군의 매복 공격으로 전사했고 1967년엔 북한군 침투조의 막사 폭파 시도에 2명이 전사하고 16명이 부상했다. 같은 해 북한군이 DMZ 인근 언덕에 위치한 미군 참호 여러 곳에 침투해 4명이 전사했고 주한미군 7사단 트럭이 30여 명의 부대원을 태우고 이동하던 중 북한군 침투조의 수류탄 공격에 차량이 폭파돼 3명이 전사했다. DMZ 남쪽 2km 떨어진 곳을 이동하던 장병 3명은 북한군이 매설한 지뢰에 트럭 두 대가 폭발해 사망했다. 병영 식당 근처에서 저녁 식사 대기 줄에 서 있다가 북한군 침투조의 무차별 총기 난사에 전사한 일병도 있다. 이듬해엔 판문점 근처를 순찰 중이던 병사 3명이 북한 무장공비와 교전을 벌이다 숨졌다. 북한군 매복과 무장공비 침투가 잦다 보니 순찰 임무 중 다른 순찰대원이 북한군으로 오인하고 쏜 총에 맞아 사망한 안타까운 경우도 있었다.

1969년 미 해군 EC-121 워닝스타 조기경보기에 탑승한 31명은 임무 수행 중 북한 미그 전투기의 대공 공격을 받고 전원 전사했다. 같은 해 DMZ 인근에서 근무하던 미군 장병 4명은 대낮에 발생한 북한군 매복 공격으로 소화기와 수류탄에 머리 관통상을 입고 전사했다. 1994년엔 DMZ 인근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중 북한군 공격으로 헬리콥터가 추락하면서 1명이 전사했다.

추모비 건립 추진 - 6·25 이후 주한 미군 전사자 101명을 기리기 위해 서울 용산에 건립 추진 중인 추모비 모형도. /한미동맹재단

한미동맹재단과 주한미군전우회는 6·25 이후 미군과 함께 싸우다 숨진 카투사 장병 전사자들도 40여 명 확인했다.

재단과 전우회는 동맹 70주년을 맞이해 서울 용산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주한미군 전사자 101명의 희생을 기리는 추모 시설 건립을 추진 중이다. 용산은 한미연합사, 유엔사, 주한미군사가 작년 10월 경기 평택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44년간 주둔한 한미동맹의 상징적 공간이다. 연구용역을 맡은 한국국가전략연구원(KRINS)은 추모비와 전사자 명패, 추모 조형물 등을 조성하는 데 약 45억원이 들 것으로 판단했다. 재단과 전우회는 정부 지원과 민간 모금을 통해 비용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한미동맹 재단 관계자는 “전쟁 이후에도 한반도를 지키다 북한군의 공격에 숨진 이들의 희생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것이 한미 동맹을 강화하고 한반도 안보를 보장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며 “어렵게 전사자 명단을 확인한 만큼 이들 전사자를 위한 추모 시설 건립이 원활히 이뤄지길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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