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화가 박수근 평론

권상인 ㈔부산문화유산연구회 이사장·예술학박사 2023. 11. 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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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8군 PX 초상화부 활동, 안개 어렴풋 낀듯한 화법
美화가 폴록의 기법 영감…자신 만의 양식으로 창조
권상인 ㈔부산문화유산연구회 이사장·예술학박사

소설가 박완서가 서울대 국문학과에 입학한 것은 1950년 6월이었다.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그해는 대학입시가 5월에 있었고 6월에 신학기가 시작됐으니 사실상 그녀의 대학 출석일은 입학식과 일요일을 빼면 고작 20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이후 그해 겨울, 참전한 중공군에 의해 서울이 다시 적 치하에 들어갔을 때 서울 시민은 대부분 남쪽으로 피란 갔으나 그녀의 가족들은 서울에 남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어린 조카와 노모를 부양해야 해 비어있는 이웃집을 기웃거리며 곡식이나 김치 등을 거둬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고 한다.

1951년 겨울까지 서울은 폐허가 되었고 한강 이남으로 피란 갔던 사람들의 도강이 엄격히 통제됨으로 서울 시민의 경제생활은 아예 죽어있었다. 그런 가운데 오직 2곳, 즉 미8군 부대가 주둔했던 용산 일대 주변의 양공주 경기가 도깨비불처럼 명멸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 한군데는 지금의 소공동 소재 신세계백화점 1층에 미8군 피엑스가 있어 미군을 상대로 여러 형태의 매매행위가 이뤄지면서 나름대로 활기에 차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백화점 근처는 거지나 소매치기 뚜쟁이 고아들의 활동 중심지가 되었다. 박완서는 먹을 것을 구하러 남대문시장에 나왔다가 우연히 오빠 친구를 만나게 돼 그의 도움을 받아 미8군 피엑스의 초상화를 그리는 부서를 관리하는 책임자로 취직이 됐다.

그 당시 초상화 부에는 5~6명의 화가가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나목(裸木)’ 즉 잎이 다 떨어진 발가벗은 고목을 즐겨 그렸던 박수근 화가였다. 그의 연보 내용은 책자마다 기록이 틀리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6·25 당시 박 화가의 신상을 보다 역력하게 추억한 박완서의 기록에 의거했다. 그는 1953년 전쟁으로 중단됐던 제2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양화부에 서울에서 그린 작품 2점을 출품했다. 이때 ‘집’이란 명제의 그림이 특선으로 선정됐고 박수근이 다른 화가들과 차별화되는 기법이 본격적으로 창출되기 시작한다.

풀어서 설명하면 그림의 배경 전면이 다듬어진 화강석 판처럼 엷은 얼룩무늬 색상의 베일에 가려져 있다. 마치 안개가 어렴풋이 낀 현실적 공간에서 보일 듯 말 듯 한 인물들이 베일의 저 너머에 숨어 있는 듯하게 그린 것을 말한다. 그의 이런 양식의 그림들은 보다 진전돼 1960년대에 와서는 거의 추상화처럼 보이기도 하는 작품으로 변모한다. 이렇게 추상적으로 변화한 박수근의 그림 중 1963년 작 ‘비둘기’ (캔버스 유채 53×29㎝)와 1960년대 그려진 ‘줄넘기하는 아이들’(캔버스 유채 41×32㎝) ‘농악’(162×97㎝)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바꿔 말하면 미국의 화가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의 작품을 연상하게 된다.

폴록은 1912년생으로 유럽의 전통적 유화 기법인 붓질 대신 화판을 바닥에 눕혀놓고 그 위에 바가지나 큰 붓으로 물감을 흘리거나 흩뿌려서 추상적 화면을 조형하는 이른바 ‘액션페인팅’을 1947년부터 시작한 미국 화가이다. 대형화면일 경우 지면에 눕혀놓고 몸을 이동해 가며 붓을 긴 장대에 매달아 칠하거나, 유화물감을 흘리거나 던져서 뿌리는 새로운 기법으로 추상적 화면을 완성한다. 그는 6·25 한국전쟁을 전후로 미국을 대변하는 추상화가로 자리 잡았으며 현대회화의 중심지를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오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박수근은 1914년 강원도 양구군 정림리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독학으로 화가의 길로 정진했다. 1932년 18세에 일제 치하에서 열린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할 만큼 화가의 자질을 선천적으로 가졌던 천재였다. 무릇 전쟁이란 군대가 먼 곳으로 이동해 가서 주둔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고대문화사 중 발칸반도의 마케도니아 청년 왕 알렉산더가 3만 명의 정예군단을 거느리고 인도 서북부 힌두쿠시협곡을 넘어 침공했을 때 고대 그리스의 선진문화가 마케도니아 군대를 따라 함께 이동해 와 간다라 미술 양식을 창출하게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박수근이 미8군 피엑스에서 초상화를 그리고 있을 즈음, 1951~53년 미군을 따라 태평양을 건너온 ‘슈퍼맨’ 만화 등과 함께 잭슨 폴록의 화첩에서 그는 획기적으로 변모한 서양화 양식을 접할 수 있었으리라! 이런 필자의 상상은 폴록의 1950년 작품 ‘라벤더·안개 넘버1’과 ‘Ⅰ: 넘버31’ 명제의 그림을 접했을 때 받은 느낌이다.


박수근의 1960년대 작품들은 화강석 판을 보는 것 같은 어렴풋한 배경으로만 그려져 있다. 웅크린 인물이나 초가집 나무들은 위에서 언급한 폴록의 기법을 화강석 문양으로 바꾸어 배경에 깔고 한국 의상을 입은 구상적 형상들을 뚜렷하게, 혹은 보일락 말락 하게 그려 넣어 자기만의 양식을 창조한 굴지의 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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