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기본이 무너진 생명윤리 규제, 시급히 정비해야
규제개혁을 논의할 때 항상 붙는 조건이 있다. 다른 규제는 완화하더라도 생명과 안전, 인권과 환경 관련 규제는 강화해야 한다. 예외주의는 개혁의 사각지대를 만든다. 합리성, 투명성, 효율성과 같은 상식은 통하지 않는다. 이런 환경에서 규제기관은 절대권력이 된다. 기업은 어디에다 하소연도 못하고 끙끙 속앓이만 한다.
이런 현상이 생명윤리심사(IRB) 제도에서 발생하고 있다. 사람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생명윤리법에 따라 사전에 기관 심사를 받아야 한다. 제도 자체는 모든 선진국에 있는 꼭 필요한 제도다. 문제는 운영이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은 심사기준이 명확하다. 연구 참여자의 안전과 권리보호에 집중한다. 우리는 윤리를 기준으로 한다. 윤리에 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렇다 보니 같은 실험계획을 심의한 결과가 기관별로 다르게 나오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이로 인해 연구책임자들의 희비가 교차하기도 한다.
하나의 연구사업에 여러 기관이 참여하는 경우는 더욱 복잡하다. 기관별 심의를 하다 보니 신속한 연구진행이 어렵다. 때로는 기관별 다른 심의 결과 때문에 연구사업 자체가 어려워진다. 이런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현행 생명윤리법은 공용기관 심의기구가 신청을 받아 심의하도록 한다.
정작 이렇게 심의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국내 공용기관 심의기구는 국가생명윤리정책원(이하 정책원)이 독점하기 때문이다. 한 기관이 많은 수의 국가연구사업을 심사하는 것은 무리다. 대학병원보다 전문성도 떨어진다. 유수의 대학병원에 공용기관 심의기구 자격을 주면 되면 해결될 일이다. 사실 법엔 이미 허용돼 있다. 그런데도 지정받은 대학병원이 없다.
정책원은 정책연구라는 설립취지와 달리 규제기관으로 활동한다. 대표적 사례가 소비자 대상 직접 시행(DTC) 유전자검사 서비스다. 2019년 기존 규제의 적용을 유예하고 실증을 하는 규제샌드박스가 언론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당시 보건복지부는 이미 시범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기업들이 산업통상자원부에 샌드박스 신청을 한 이유는 복지부가 허용하지 않은 항목을 실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4개 기업의 신청은 많은 논란 속에 통과됐다. 문제는 부대조건이다. 정책원의 생명윤리 심사를 받도록 했다. 이후 샌드박스 사업에 부정적이던 복지부는 정책원을 통해 사업의 범위를 축소하기 시작했다. 당초 취지와 다르다며 기업은 반발했고 심사를 마무리하는데 2년이 걸리기도 했다. 사업이 종료될 시점에 사업이 시작됐다.
그 사이 DTC 유전자검사기관 인증제가 도입됐다. 이 제도는 검사역량을 인증한다는 법률취지를 벗어나 기업활동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기업은 영업비밀인 홍보 및 판매계획서까지 제출해야 한다. 유전자검사능력을 전문으로 인증하는 기관으론 유전자검사평가원이 있다. 그런데도 DTC 유전자검사는 윤리심사를 하는 정책원이 인증제 운영을 맡았다.
가장 큰 문제는 규제집행의 적정성 여부다. 국가생명윤리정책원은 기업 대상으로 세부 평가기준을 발간할 정도로 규제권한을 주도적으로 행사한다. 정작 법적 지위는 불확실하다. 이 기관은 민법에 따라 설립한 기관이다. 검사역량 인증에 관한 복지부 고시에도 기관의 공식 명칭은 나오지 않는다. 기업들은 업무처리가 불명확하다고 하소연한다. 공무원은 규제개혁에 대한 교육을 받는다. 정책원은 다르다. 민간인 신분으로 규제집행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기대하기 어렵다.
생명윤리는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고 무조건 규제를 강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합리화되지는 않는다. 정부가 국내 기업의 DTC 유전자검사 서비스를 철저히 통제하는 동안 해외 기업은 활발한 마케팅을 통해 국내 시장에서 점유율을 넓히고 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대신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지금 세계는 바이오경제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무한경쟁을 한다. 이제 사각지대에 있는 생명윤리 규제를 개혁의 수술대에 올려놓아야 한다.
곽노성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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