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기억 조절하는 신경세포 찾았다…PTSD 치료 새 길 열려
2004년 개봉한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서로에게 상처입은 두 연인이 상대에 대한 기억에 고통받다가 기억을 완전히 지운 뒤 일어나는 일을 그렸다. 이렇게 아프고 두려운 기억은 실제로 상처 이상의 고통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국내 연구진이 특정 뇌 영역이 활성화될 때 작동하는 신경회로의 시냅스(신경세포 연결부위)를 구별하는 기술을 이용해 공포 기억을 조절하는 메커니즘을 알아냈다.
강봉균 기초과학연구원(IBS) 인지 및 사회성 연구단장 연구진은 9일 기억저장 세포와 주변의 억제성 뉴런(신경세포)이 연결된 시냅스를 시각화하는 기술로 공포 기억을 조절하는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는 뇌과학 분야 국제 학술지 ‘뉴런(Neuron)’에 이날 게재됐다.
인간은 뇌에 기억을 저장하고, 기억을 바탕으로 행동을 변화시킨다. 두려움에 관한 기억은 위험한 환경을 예측하고 외부 자극에 대한 적절한 반응을 하도록 돕지만, 무절제하게 발현될 경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같은 불안장애를 부르기도 한다.
최근 기억에 대한 연구는 기억을 저장한다고 알려진 기억저장 세포(Engram Cell)와 신경세포의 연결부인 시냅스 수준까지 정밀하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가 아직까지 주로 뇌의 장거리 영역 간 연결에 집중돼 있다. 이는 기술적인 한계로 매우 가까이 있는 뉴런 사이의 시냅스를 식별하고 시각화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지난 2018년 기억저장 세포 사이의 시냅스를 종류별로 구분하는 ‘Dual-eGRASP’ 기술을 개발했다. 이 기술은 형광 표식을 이용해 서로 다른 신경세포에서 나온 시냅스를 청록색과 노란색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연구팀은 이 기술로 기억저장 세포와 기억저장에 관여하지 않는 세포 사이의 연결을 4가지 조합으로 구분했다.
연구팀은 이 기술을 활용해 기억을 형성할 때 활성화된 뉴런들이 기억저장 세포가 되며 이들 세포를 연결하는 시냅스가 바뀐다는 점을 알아냈다. 하지만 당시에는 뇌에서 물리적으로 구분된 영역 사이의 흥분성 뉴런들의 연결이 변화하는 것을 확인하는 수준에 그쳤다.
뇌의 적절한 기능 발현과 조절에서 억제성 인터뉴런(신경세포와 신경세포 사이를 연결해주는 신경세포)도 흥분성 뉴런만큼이나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전까지는 기술적인 한계로 인접한 뉴런을 잇는 시냅스를 구별하는 것이 어려웠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에서 뇌의 한 영역 내에 있는 뉴런들 사이의 시냅스를 종류별로 구별하는 방법인 ‘LCD-eGRASP’ 기술을 새로 개발했다. 이를 이용해 공포와 관련된 기억과 학습을 관장하는 것으로 알려진 기저외측편도체(Basolateral amygdala)의 억제성 뉴런이 기억을 조절하는 메커니즘을 밝혀냈다. 기저외측편도체는 감정, 특히 공포와 관련된 기억과 학습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위로, 척추동물에서 진화적으로 잘 보존된 뇌의 영역으로 간주된다. 기저외측편도체의 억제성 뉴런이 주변의 기억저장 세포와 맺고 있는 국소 신경회로 사이에서 어떠한 변화가 나타나는지 조사했다.
연구팀은 먼저 생쥐에 전기 자극을 가해 공포 기억을 경험시켰다. 이어 새 기술을 활용해 기저외측편도체의 억제성 뉴런 중 하나인 소마토스타틴 인터뉴런의 일부가 공포 기억을 형성할 때 특이하게 활성화되는 것을 확인했다. 또 기저외측편도체의 기억저장 세포들과 더 많은 시냅스를 형성한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확인했다.
공포 기억에 자극된 소마토스타틴 인터뉴런은 그렇지 않은 인터뉴런에 비해 더 많이 흥분되고 공포 기억 저장 세포의 활동을 억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포 기억이 떠오르는 상황에 처하면 흥분성이 낮아지고 공포 기억저장 세포가 작동해 공포 기억을 정상적으로 떠올렸다.
연구팀이 소마토스타틴 인터뉴런을 억제하자 공포 반응은 더 강하게 나타났다. 반대로 활성화하는 경우에는 공포와 관련된 불안 반응이 줄어든 것을 확인했다. 소마토스타틴 인터뉴런의 상태에 따라 공포 기억 반응에 직·간접적 변화가 나타난다는 뜻이다.
이는 억제성 뉴런이 기억저장 세포와 조화를 이뤄 기억을 떠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공포 기억을 형성할 때 활성화된 소마토스타틴 뉴런이 공포 반응을 조절하는 중요한 조율자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구팀의 이훈원 박사후연구원은 “쥐 실험에서 나타난 것은 ‘기억의 표현’”이라며 “실험용 쥐에게서 드러난 행태가 기억의 변화 때문인지, 기억의 인출 때문인지는 아직 구분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 연구원은 “억제성 뉴런 같은 기억세포 주변의 역할을 입증해 공포와 관련된 치료의 새 가능성을 열었다는 것이 연구의 성과”라고 말했다.
강봉균 단장은 “흥분성 기억저장 세포에 집중한 기존 연구에서 한 단계 나아가 국소 영역에서 억제성 뉴런의 역할을 규명하고, 억제성 인터뉴런을 통한 기억 조절의 가능성을 확인했다”며 “향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같은 질병 연구에 활용될 수 있다”고 밝혔다. 강 단장은 또 “‘LCD-eGRASP’ 기술은 뇌의 한 영역 내 시냅스를 종류별로 구별할 수 있다”며 “뇌의 영역 간 시냅스 표지 기술인 ‘Dual-eGRASP’와 함께 신경과학 분야의 핵심기술로서 자리잡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뉴런을 넘어 뇌를 구성하는 다양한 교세포들과 기억저장 세포의 상호작용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연구 범위를 확장할 계획이다.
참고 자료
Neuron (2023), DOI: https://doi.org/10.1016/j.neuron.2023.1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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