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개혁에서의 '공포 마케팅'과 '포퓰리즘 마케팅' [아침을 열며]
2003년 1차 국민연금 재정계산부터 2023년의 5차 재정계산에 이르기까지 위원회에 모두 참여하면서 특히 재정안정분야를 담당해 오다 보니, 필자에게 붙여진 단어가 있다. 재정안정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그 당위성을 입증하기 위해 국민이 불안감을 느끼는 수치를 서슴없이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공포 마케팅의 주창자'라는 말이다. 예를 들자면 필자가 사용하는 이런 수치 때문이다. "우리 국민연금제도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2093년까지 국민연금 누적적자가 현재가치로 7,750조 원을 넘어갈 것이다. 2023년 현재 국민연금의 미적립 부채가 1,825조 원에 달하고 있어, 국민연금 가입자 1인당 8,500만 원이 넘는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최근 한 일간지의 '실종된 연금개혁, 고이즈미를 불러오자'는 칼럼은 필자의 접근방법에 문제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성공적인 연금개혁으로 흔히 언급되는 일본의 2004년 개혁의 성공 배경이, 연금제도를 그대로 방치하면 '100년 뒤에 연금 지급할 돈이 480조 엔(약 4,330조 원) 부족하다'라는 일본 후생노동성의 재정추계를 공개한 결과라고 해서이다. 수치를 밝힐 수 있었던 배경은 연금이 처한 어려운 현실을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고이즈미 총리의 철학 때문이었다고 한다. 우리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 2007년 국민연금 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국민연금 개혁이 없으면 하루에 800억 원씩의 부채가 쌓인다는 노무현 정부의 호소가 있어서였다.
최근 공개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 따르면, 많은 반대가 있었음에도 공무원연금을 개혁할 수 있었던 것은 '개혁하지 않으면 하루에 80억 원 세금이 더 들어간다'는 슬로건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국민연금 미적립부채와 누적적자를 공개하자고 하면, 1,000조 원이나 되는 적립금이 있는 데도 천문학적인 수치의 연금 누적적자를 공개하여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할 이유가 있느냐고 반박한다. 이른바 '공포 마케팅' 프레임 설정의 근원지다.
이처럼 중요한 수치를 공개하지 않다 보니 망국적인 포퓰리즘이 극성을 부리고 있다. 최근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국민연금종합운영계획(안)'에 수록된 내용에 따르면 '더 내고 더 받는 것'을 선호하는 비율이 제일 높다고 한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려 주지 않고, 단순하게 어떤 안을 선호하느냐고 물으니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어떤 대안들에 대한 선호도를 조사할 때는, 장기적인 파급효과도 알려 주어야 제대로 된 선호도 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다.
UN ESCAP 발간 책자인 The Promise of Protection(2011)은 '국민이 좋아할지라도 그 제도가 지속이 불가능하다면 포퓰리즘'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최근 라디오 뉴스쇼 생방송에서 필자가 '국민연금 보험료를 조금 더 내고 연금을 더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두고 '포퓰리즘 마케팅'이라고 부른 이유다. 국민연금 보험료를 3%포인트 더 부담하면서 연금 지급률을 10%포인트 더 올리면, 국민과 언론의 관심 사항인 기금소진 시점은 몇 년 더 연장된다. 문제는 현재 20세인 젊은 층이 사망할 시점인 70년 후, 즉 5차 국민연금 재정계산 평가 기간 말인 2093년에 가면 현재가치로 1,404조 원이나 적자가 더 늘어난다는 사실이다(국회 예산정책처). 이를 알려 주지 않으면서 선호도를 조사하니 이처럼 어이없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국민연금 개혁 방향성에 대한 국민의식 조사 결과를 보여주고 있는 '국민연금종합운영계획(안)' 내용(21쪽)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20대에 비해 50대는 더 내고 더 받는 개혁 선호가 높고, 덜 내고 덜 받는 개혁 선호는 낮은 편'이라고 언급하면서도, 의견을 물어본 전체 2,025명 중에서 20대가 428명, 50대는 587명이다. '더 내고 더받는 국민연금 개편안'을 선호하는 응답자 비율이 더 많게 설문조사를 하고서는, '더 내고 더 받는 개혁'을 38%가 선호하는 반면에, '덜 내고 덜 받는 개혁'은 23.4%가 선호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니 이러한 결과를 가지고 '포퓰리즘 마케팅'을 옹호하는 쪽에서는 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더 내고 더 받는 개편안'을 우리 국민이 가장 선호한다고 거리낌 없이 말하고 있다. 최근 필자가 출연한 TV 생방송에서의 상대 패널 발언 내용이 이러하다 보니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은 추가 회의를 개최하면서까지 어렵게 합의했던 재정계산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합의내용이 어찌 된 이유에서인지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제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에는 빠져 있다는 점이다. 10월 13일 개최된 마지막 회의인 22차 회의에서 필자는 당초 회의 자료로 준비한 '국민연금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조정에 따른 재정전망' 내용이 국민과 언론에 잘못된 정보와 시그널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국민연금 기금 소진 이후 재정추계 최종시점인 2093년까지의 누적적자를 현재가로 기재할 것을 요구하였다. 난상토론 끝에 기금소진 시점부터 2093년까지의 누적적자를 GDP 대비 비율로 표시하기로 합의를 도출했다.
문제는 당시 합의사항이었던 국채 이자율이 아닌 기금투자 수익률로 할인한 누적적자 비율이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 보고서'의 39쪽에 수록되었다는 점이다. 보험료를 12%로 3%포인트 인상하고 소득대체율을 50%로 인상할 경우 보고서에 수록된 기금투자수익률로 할인한 2093년 GDP 대비 누적적자 비율이 95%다. 그런데 위원회에서 당초 합의했던 대로, 공무원연금의 충당부채 산정 시 사용되는 국채 이자율로 할인하면 2093년 GDP 대비 누적적자 비율은 180% 정도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난다. 이처럼 할인율에 민감하다 보니, 일본처럼 그대로 누적적자 수치를 공개하라고 했던 것이다.
문제는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제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의 29쪽에 수록된 '재정계산위: 소득대체율 관련 재정전망'에는 아예 2055년 기금 소진 이후 2093년까지의 GDP 대비 누적적자 비율 항목 자체가 빠져 있다. 2004년 일본 연금개혁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5차 국민연금 재정계산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 항목이 정작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종합운영계획에서는 빠져 있다. 그러니 우리 정치권에서 망국적인 포퓰리즘 정책들이 활개를 칠 수 있는 것이다.
필자가 이끌어 가는 연금연구회가 11월 7일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2차 세미나를 개최했다. 연금연구회 회원인 한양대 전영준 교수 발표에 따르면,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40%로 유지할지라도 2023년의 국민연금 미적립부채(이미 지급하기로 약속한 연금액 중에서 부족한 금액)가 1,825조 원(2023년 GDP 대비 80.1%), 2090년에는 4경4,385조 원(2090년 GDP 대비 299.3%)으로 추정된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지금보다 10%포인트 올리면, 2090년 미적립 부채는 6경8,324조 원(2090년 GDP 대비 460.7%)으로 약 2경4천조 원이나 늘어난다. '경'이란 단위도 놀라 쓰러질 지경인 데, 2경4천조 원이나 더 늘어난다. "태평양에서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서는 폭풍우를 일으킨다"는 말이 이래서 생겨난 것 같다.
우리 국민 다수가 선호한다는 '더 내고 더 받는' 국민연금 개편안의 후과가 이렇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선호도를 조사해도 똑같은 결과가 나올까? 아니라고 본다. 2007년 국민연금 개혁과 2015년 공무원연금 개편과정에서의 경험이 있어서이다. 국민연금의 누적적자를 밝혀 연금개혁에 성공한 나라가 일본이다. 연금을 일본에서 배워 왔는데, 왜 이처럼 중요한 사례는 배우지 못하는가? 하루라도 빨리 국민연금의 누적적자와 미적립 부채 규모를 사실 그대로 밝혀야 한다. 제대로 된 연금개혁의 길이, 국민연금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밝힘에 있다는 것을 과거 우리와 일본의 성공적인 연금개혁 과정에서 경험했기 때문이다.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명예연구위원·한국연금학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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