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커창, 살아서도 죽어서도 ‘현실을 얻고 꿈을 잃었다’
1955년 7월, 중국 안후이성 허페이시의 평범한 주택가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해는 연초부터 한바탕 피바람이 불 것 같은 불길한 조짐이 감돌았다. 1950년 이후 마오쩌둥은 사회 각계 지식인과 관료계층을 대상으로 강도 높은 사상개조 운동을 진행했는데, 그것은 종종 ‘목욕’(洗澡)이라고 불렸다. 머릿속에 찌든 온갖 반동사상을 목욕하듯이 깨끗이 씻어내야 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목욕’ 과정은 모욕적이고 폭력적이었다. 1955년 새해 벽두부터 살갗을 온통 벗겨낼 듯한 기세로 맹렬한 사상 목욕 운동이 시작됐다.
스스로 ‘목욕’하는 법을 배운 아이들
1955년 1월20일, 당시 유명 문예 이론가이자 평론가이던 후펑의 문예사상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며 중앙선전부가 정부에 제출한 ‘후펑 사상 비판 전개에 관한 보고’가 시발점이 됐다. 후펑이 전격 체포됨과 동시에 문화예술계를 넘어 사회 전체로 격렬한 사상투쟁과 반혁명분자 색출 작업이 벌어졌다. 중앙정부는 사회 곳곳에 숨은 반혁명분자와 불순세력이 5% 정도 된다며 그들을 모두 색출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해 7월 이후, 중국의 온 도시와 마을에서는 ‘5%를 색출하기 위한’ 피비린내 나는 광풍이 불었다. 이 광풍은 1958년 대약진 운동과 1966년 문화대혁명(문혁) 발발로 이어지는 대공포 시대의 개막이자 본격적인 빙하기로 접어들게 했다. 그 시기에 태어난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스스로 ‘목욕하는 법’을 배웠고, 자라서는 홍위병이 되거나 농촌으로 하방돼 긴 세월 동안 온갖 종류의 투쟁에 참여했다.
대공포 시기라는 빙하기에 태어나 청춘의 한 시절을 ‘마오쩌둥 사상’에 헌신하며 보냈던 그 아이는 자라서 ‘훌륭한’ 사람이 됐다. 바로 2013년부터 2023년 3월까지 10년간 제7대 국무원 총리를 지낸 리커창이다. 안후이성 허페이시 훙싱루 80호에 살았던 그는, 어릴 때부터 영민했고 손에서 늘 책을 놓지 않는 책벌레였다. 그의 아버지 리펑싼은 당시 안후이성 통일전선부 처장으로 중간 관료 계층에 속했다. 나중에 리펑싼은 성정부 산하 지방지(地方志·지역의 지리와 역사 등에 관한 기록물) 판공실 부주임으로 전임한 뒤 퇴직했다.
리펑싼은 아들의 학구열을 눈여겨보며 ‘싹수가 보인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어린 시절부터 학식 높은 이웃집 선생에게 사숙을 시켰다. 덕분에 리커창은 무시무시한 ‘목욕’이 횡행하던 그 시절에도 좋은 선생을 만나 금서나 다름없는 각종 고전을 읽으며 지식과 교양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2013년 총리로 취임할 때, 중국 내 많은 매체는 리커창의 고향과 모교로 달려가 신임 총리의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에 관한 훈훈한 미담을 경쟁적으로 취재해 보도했다. 당시 보도에서 소개된, 주변에 살았던 이웃 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어린 시절 리커창은 “매사에 성실하고 공부를 좋아했으며, 다른 아이들과 달리 짓궂지 않았고 말도 그리 많이 하지 않던 순한 아이였다. 무엇보다 아버지 말을 잘 듣는 고분고분한 아이”였다.
그가 관직에 올라 줄곧 보였던 ‘온화하고 과묵하지만 조화와 단결을 중시한’ 이미지는 타고난 기질이었을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든든하고 단단한 경계를 박차고 나가려는 반항이나 모험을 해본 적이 거의 없다. 기회가 찾아오면 늘 순응해가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시절에 항상 학생회 간부를 했는데 누구보다 헌신적이고 성실했으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문화대혁명 말기 ‘하방’서 체제 순응
리커창의 학구열에 대한 미담은 초등학교부터 대학 시절까지 끝도 없이 쏟아진다. 초등학교 때 병이 나서 한동안 집에서 쉬고 있을 때도, 그는 매일 아침 일어나 책을 읽고 누가 시키지도 않은 숙제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그의 중·고등학교 선생님과 친구들도 이구동성으로 “리커창은 앞날이 기대되는 인재였다”고 떠올렸다. 한때 학자의 꿈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지지만, 그는 일찍부터 체제에 길들고 순응하는 ‘관료의 길’로 스스로 걸어갔다. 그는 꿈 대신 현실을 선택했다.
2013년 3월15일 제7대 총리로 선출된 뒤 중국중앙텔레비전(CCTV) 등 관방매체에서 공식적으로 보도한 그의 ‘사회생활 시작’은 1974년이다. 허페이시 제8중학교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리커창은 1974년부터 1976년까지 안후이성 추저우시 펑양현 다먀오진에 있는 둥링촌이라는 작은 농촌마을에서 하방 생활을 했다. 당시는 문혁이 말기에 접어들던 때로, 광기만 남은 홍위병들이 통제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고 경제 상황도 최악이라 일자리가 부족해지자 마오쩌둥은 ‘노동인민대중의 삶 속으로 들어가 배우라’며 전국 각지의 도시 청년들을 농촌으로 내려보냈다. 리커창이 1974년 펑양현으로 갔을 때만 해도 문혁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고, 어쩌면 한평생 그렇게 농촌에서 ‘썩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중·고등학교 때부터 간부로 단련됐던 리커창은 ‘지식청년’ 시절에도 탁월한 간부 기질을 발휘했다.
관방매체 등에서 나온 공식 보도에 따르면 그 시절 리커창은 ‘뛰어난 능력을 보여서’ 마을 생산대 당지부 서기라는 최고 간부가 됐다. 더 나아가 ‘안후이성 마오쩌둥 사상 학습 선진 개인’이라는 호칭도 얻었다. 당시 이는 중국에서 가장 영예로운 호칭이었고, 중국 사회에서 존중받는 ‘사회적 신분’을 획득했음을 뜻했다. 체제순응적 기질과 관료의 ‘싹수’가 이미 그때 뿌리내렸던 것이다.
유학 대신 시위·소요 통제 맡는 관료
빙하기가 끝나고 해빙기가 찾아왔다. 1976년 드디어 문혁이 끝났고, 마오쩌둥도 죽었다. 대공포 시대가 가고 숨통이 조금 트이기 시작했다. 문혁 때 중단됐던 학교도 다시 문을 열고 대학교 입시도 부활했다. 1977년 대학입시가 부활한 첫해, 리커창은 베이징대학 법학과 신입생이 됐다. 그는 대학 시절 내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학구열을 보였다. 수많은 영어 법전과 고전을 번역했고, 다른 학생보다 월등한 학문적 성과를 줄줄이 이뤄냈다. 동창들은 그가 나중에 틀림없이 저명한 학자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공부하기도 바빴을 텐데 재학 시절 내내 학생회 간부도 했다.
문혁이 끝나고 청년들은 그동안 배우지 못하고 읽지 못했던 온갖 지식과 책에 걸신들린 듯이 빠져들었다. 그동안 닫혔던 중국 바깥 세계에 대한 호기심도 들끓었다. 1980년대 이후 대학가와 문화계를 중심으로 지식인 사이에서 중국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둘러싸고 각종 논쟁이 불붙었고, 서구사상과 문화에 대한 논쟁과 학습열이 달아오르는 이른바 ‘문화열’이 일어났다.
중국 문화의 황금시대라는 이 시기에 시인 베이다오는 “비루함은 비루한 자의 통행증, 고상함은 고상한 자의 묘비명 (…) 너에게 고하노니, 세계여! 나는 믿지 않아!”라는 시를 발표해 청년들에게 일약 충격을 던졌다. 베이다오는 시에서 ‘빙하기가 끝났는데도 왜 곳곳에는 얼음투성이냐’고 절규했다. 빙하기가 끝난 듯했지만 완전한 해빙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1989년 천안문 사건을 전후해 대학가에선 늘 크고 작은 시위와 소요가 벌어졌다. 이 와중에 일부는 중국 체제에 절망해 국외 유학을 떠나거나 반체제 인사가 됐고, 일부는 일찌감치 돈벌이의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중 또 한 부류는 체제의 핵심 관료 조직에 들어가 개혁을 꿈꾸기도 했다.
리커창이 어떤 생각을 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학사·석사 과정을 마친 뒤 유학을 꿈꿨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능력을 눈여겨본 대학 당국의 만류와 간청으로 학교에 남아 베이징대학 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서기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관료 인생을 시작했다. 공청단 서기가 된 그의 임무는, 베이징대학 등 대학가에서 정치적 시위와 소요가 일어나지 못하게 사전 통제와 진압을 하는 것이었다.
시진핑 아래 ‘가장 무력한’ ‘최고 학벌’ 총리
리커창과 같은 시기에 베이징대학을 다녔던 정치학자 우궈광은 미국 방송 <미국의소리>에 기고한 글에서 “1986년 겨울, 전국적으로 학생시위가 발생했을 때 리커창은 베이징대학에 와서 절대로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통제했다. 정치적 앞길을 위해 그는 원래 가지고 있던 독립적인 사고능력을 이미 포기했던 것”이라고 회고했다. ‘리커창의 비극’은 그때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얼음투성이를 깨는 대신 ‘꿈은 가짜’라는 현실 세계와의 타협을 선택했다.
2013년 3월15일, 전세계 언론은 중국 제7대 총리의 등장을 일제히 타전했다. 2008년 53살의 나이로 중국에서 가장 젊은 부총리, 베이징대학 경제학 박사라는 역대 가장 학벌 높은 총리라는 ‘기록’을 보유한 리커창의 이름 앞에는 또 하나 꼬리표가 붙어다녔다. 역대 가장 ‘무력한’ 총리. 그는 ‘시진핑 일인 천하’ 시대에서 수족이 잘린 불구나 마찬가지였다. 외신은 그를 권력투쟁에 패해 밀려나 소외된 ‘비운의 2인자’라고 표현했다. 혹자는 스스로 순응하고 타협해야만 하는 중국식 2인자의 정해진 비극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리커창의 표정과 눈빛은 늘 고독하고 공허해 보였다.
2023년 10월27일 0시10분, 리커창 전 총리가 서거했다. 사인은 심장마비. 향년 68. <인민일보> 등 관방매체에 실린 당과 정부 차원의 공식 부고문은 관방 언어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와 미사여구가 빼곡하게 들어찼다. 말미에는 이렇게 쓰였다. “그의 서거는 당과 국가의 큰 손실입니다. 우리는 슬퍼하는 대신 그것을 역량으로 바꿔서 그의 혁명정신과 고상한 품성, 훌륭한 작풍을 배워야 합니다. 더 나아가 시진핑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중심으로 더욱 긴밀하게 단결하고, 중국특색 사회주의 사상의 위대한 기치를 높이 들고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를 전면 관철하고….” 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현실을 얻고 꿈을 잃었다’.
2023년, 새 총리가 취임하고 새 정부가 들어섰다. 불길한 조짐이 또다시 감돈다. 한바탕 피바람이 불고 수많은 새 ‘목욕법’이 발표됐다. 다시 빙하기가 시작됐다. 리커창 전 총리의 명복을 빈다.
베이징(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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