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균의 초속 11.2㎞] 뛰어난 선수는 전광판을 꼭 본다

이용균 기자 2023. 11. 8. 20:3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주자가 1루와 3루에 있다. 팀 내 가장 장타력이 좋은 4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목표는 단순하다. ‘강하게 치는 것’. 담장을 넘어가면 금상첨화다.

과연 정말 그럴까. 전광판을 보지 않은 채 ‘내 스윙’만 하면 될까. 그러면 팀이 이길까.

야구 전광판에는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지금이 몇 회인지, 점수 차는 얼마인지, 아웃카운트와 볼카운트는 어떻게 되는지.

야구는 축구, 농구와 달리 ‘실시간 경기’가 아니다. 투수가 공을 던질 때마다 플레이가 끊어졌다 이어지기 때문에 분절된 데이터가 차곡차곡 쌓인다. 야구에는 승리확률기여도(WPA)라는 기록이 있다. 주자 상황, 이닝, 점수 차, 아웃카운트 등을 종합해 해당 상황에서 승리할 확률을 계산하고 그 타석의 결과가 승리 확률을 얼마나 높이거나 낮추는지 계산한다. 메이저리그에서 1903년부터 2022년까지 치러진 총 18만3331개의 경기로 확률을 계산한다.

점수 0-0인 상황에서 1회초 1사 1, 3루라면 원정팀(1회초 공격팀)의 승리 확률은 52.85%가 된다. 4번 타자가 3점 홈런을 친다면 승리 확률은 71.43%로 높아진다. 그런데, 5점 차로 앞선 8회 1사 1, 3루 상황이라면 이미 승리 확률은 99.0%다. 병살타를 치더라도 승리 확률은 0.89%포인트만 줄어들 뿐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전광판 보지 않고 그냥 ‘내 스윙’을 해도 된다.

그런데 동점인 5회초 1사 1, 3루라면 계산은 복잡해진다. 이때 원정팀 승리 확률은 58.05%. 홈런을 쳐서 3점을 올리면 승리 확률은 82.51%로 높아지지만, 홈런은 마음먹는다고 나오지 않는다. 외야 뜬공으로 1점을 얻는다면 승리 확률은 60.67%로 높아진다. 대신 병살타가 나오면 승리 확률이 48.9%로 뚝 떨어진다. 방망이에 맞은 공이 어디로 갈지는 야구의 신만 알 수 있지만 전광판을 보지 않은 채 ‘내 스윙’만 고집하다가는 팀을 위기에 빠뜨릴 수도 있다.

단지 점수 차이와 승리 확률만 고려할 것도 아니다. 뛰어난 4번 타자라면 5회나 6회, 상대 불펜 투수들의 기용 가능성 등도 고려해야 한다. 4번 타자의 출루를 통해 선발 투수를 끌어내릴 수 있다면 가능한 한 스윙을 하지 않은 채 기다리는 것도 승리 확률을 높이는 중요한 전략이다. 상대 불펜을 일찍 끌어낸다면 경기 후반 승기를 가져오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반대로 우리 팀 불펜 상황이 좋지 않다면, 이 장면에서 어떻게든 승부를 내야 한다. 어중간한 1점이 아니라 확실한 2~3점을 위해 도박을 걸어야 할 수도 있다. 2구째 들어올 가능성이 높은 슬라이더에 승부를 걸기 위해 초구 직구에 과감하게 헛스윙을 하는 타자도 있다. 치밀한 수싸움 속에 나오는 일종의 ‘블러핑’이다.

진짜 뛰어난 선수는 다음, 그다음 타석까지도 계산한다. 지금 타석의 결과가 승부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은 상황이라면 특정 구종이나 한쪽 코스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다음 타석을 위한 ‘덫’을 놓는다.

뛰어나지 않은 선수는 전광판의 일부만 본다. 경기 흐름 대신 자신의 타석 결과만 신경 쓴다. 이미 승부가 기울어진 상황, 상대의 경계가 느슨해졌을 때 오히려 더 큰 집중력을 쏟는다. 안타를 2개쯤 쳤다면, 그래서 타율에 보탬이 됐다면 경기 후반 빠지고 싶어 하는 것도 이런 선수의 특징이다.

그것보다 더 좋지 않은 선수는 전광판을 하나도 안 보고, 관중석만 본다. 타석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 지나친 분노를 드러내거나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것처럼 행동한다. 관중석을 향한 보여주기식 오버일 가능성이 높다. 주심의 볼 판정이 잘못됐다고 느껴질 때 펄펄 뛰면서 과하게 항의하는 게 대표적이다. 승리를 향한 집중력, 또는 ‘근성’으로 포장되기도 하지만 심판도 사람인지라 다음 타자에게 긍정적 영향보다는 부정적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다. 심판의 아웃, 세이프 판정에 대해 펄펄 뛰면서 벤치를 향해 비디오 판독을 요청하는 것 역시 관중석만 보는 선수들의 행동이다. 팀당 한 경기에 두 차례만 주어지는 기회를 날린다면 팀에는 분명 손해다.

무엇보다 야구는 실패가 흔한 종목이다. 모든 타석에서 안타를 칠 수 없고, 120개 투구 중 20%는 실투다. 우승팀도 40%는 진다. 실수와 실패를 통해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종목이다. 그러니까 전광판을 열심히 보고 데이터를 확인한 뒤 지금 상황에서 우리 팀이 승리할 수 있는 확률을 높여야 한다. 경기장의 선수는 전광판을 보지 않는다? 아니다. 진짜 뛰어난 선수는 전광판을 열심히 보고 분석하는 선수다. 정치인 몇몇의 얼굴이 떠오른다고? 아니다. 이건 야구 얘기다.

이용균 뉴콘텐츠팀장

이용균 뉴콘텐츠팀장 noda@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