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잡고 싶은 정치인 되기

기자 2023. 11. 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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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서구청장 선거 이후, 정국은 총선을 향한 빠른 레이스가 시작된 모양새다. 쏟아지는 여론조사 결과와 난무하는 정치공학적 담론들로 머리가 어지러운 것을 보면, 총선을 향한 여당과 야당의 고민 역시 그 어느 때보다 깊은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오가는 담론들 속에 정작 정치의 본래 목적과 그것이 지향해야 할 원론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 듯하다. 너무 당연해서, 그래서 논의할 필요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새겨볼 필요조차 없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1637년 음력 9월9일, 예안현(현 경북 안동시 예안면 지역)은 현감 이경항의 갑작스러운 사직 통보로 술렁였다. 3개월 전 불명예스럽게 파직된 전임 현감 김경후의 뒤를 이어, 그가 부임한 지 불과 2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경항은 전임 현감들이 현의 크고 작은 일들을 아전들에게 일임한 후 그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현 행정이 파탄나는 사례들을 많이 보았다. 현의 사무를 엄격히 관리하고, 현에 속한 아전들과 관속들을 강하게 단속했던 이유였다.

그러나 이경항의 엄격함은 아전과 관속들을 대상으로 할 뿐, 백성들에게는 달랐다. 그가 예안현감으로 부임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십결포(十結布)라는 세금을 거두는 일이었다. 십결포는 포의 품질에 따라 아전들이 농간을 부릴 여지가 많았다. 그러자 이경항은 이 업무를 자신이 직접 챙기면서, 아전들이 농간을 부릴 여지를 막았다. 그러면서도 힘든 살림살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품질이 떨어지는 포를 제출한 백성들에 대해서는 모른 척했다. 심지어 이경항은 양반들의 명으로 심부름 온 하인들이 관아를 찾으면, 그들에게까지 술을 내주고 노고를 위로했다.

불과 2개월간의 일이었지만, 늘 현감과 대립각만 세웠던 지역 양반들조차 그의 사직을 반대하고 나설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예안현에서 이경항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은 알량한 지위를 활용해 자기 이익을 챙긴 아전과 관속들뿐이었다. 이경항의 강력한 단속으로 아전들에게 기생했던 관노 이정립과 이의립, 이지립이 도망친 이유였다. 그리고 얼마 뒤 관아의 일을 맡아 보던 이수백과 조경택도 가족들을 데리고 도망쳤다. 이경항은 황당함을 넘어 분노와 실망이 극에 달했다. 안 그래도 늙고 병든 부모를 모시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던 그는 이 사태로 사직을 결정했던 터였다.

이경항은 9월11일 새벽에 길을 떠날 것이라고 향청에 조심스럽게 알려왔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향청의 좌수 윤동창은 고을 사람 모두에게 이 소식을 퍼뜨렸다. 9월11일 새벽, 길을 떠나려고 말에 올랐던 이경항은 동헌 앞에 모인 60여명의 백성들로 인해 말머리를 돌려야 했다. 예안현 백성들 모두가 말고삐를 틀어쥐고는 떠날 수 없다며 현감의 길을 저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김광계를 비롯한 예안 고을 양반들도 합세하여 사직 결정을 철회해 달라고 요청했다. 심지어 몇몇 양반들은 경상감사에게 그의 사직을 허락하지 말라고 민원까지 넣었다. 예안 고을이 양반뿐 아니라 양민들까지 이렇게 똘똘 뭉친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한마음으로 이경항이 남기를 원했던 것이다.(출전: 김광계, <매원일기>)

정치의 수혜를 국민들이 몸으로 느끼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다. 국민들에게는 정치하는 사람의 시선과 진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는 능력이 발달돼 있기 때문이다. 물론 김경후가 현감이었을 때 예안현의 상황이 워낙 가혹했기에, 이경항의 정치가 예안백성들에게 더욱 크게 와 닿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떠나려는 예안현감의 발목을 잡아야 할 정도의 절실함은 이 같은 단순 비교 우위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정치공학적 고민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라는 말이다. 국민들이 봉착한 문제 앞에 정확히 서는 것, 그래서 국민들과 동일한 시선으로 그들 앞에 놓인 문제들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그리 어려운 일일까?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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