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암표상의 진화

김홍수 기자 2023. 11. 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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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1997년 서울극장에서 PC통신 예매 시스템을 도입하기 전엔 극장 매표소 앞에 줄을 서서 표를 사야 했다. 영화관 입구에 ‘만원 사례’ 팻말이 붙으면 옆구리를 찌르며 ‘표 있어요’라고 속삭이는 암표상들이 활개를 쳤다. 유능한 암표상은 흥행 가능성이 높은 영화를 선별하는 안목, 매표원을 구워삶는 사교력, 티켓 매수 가능성이 높은 데이트족을 골라내는 선구안 등 3박자를 두루 갖춰야 했다. A급 암표상은 1년에 집을 한 채씩 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요즘 암표상의 핵심 경쟁력은 컴퓨터 매크로(macro) 프로그램 사용 능력이다. 매크로란 자주 사용하는 명령어를 키 하나에 묶어 자동 반복 작업을 시키는 프로그램을 말한다. 1990년대 PC 온라인 게임이 유행할 당시 게이머들이 게임 아이템을 싹쓸이할 때 많이 활용했다. 이후 대학교 수강 신청, 명절 기차표 예매, 공연 티켓 예매 등 선착순으로 기회를 잡는 곳으로 용도가 확장됐다. 요즘엔 캠핑장, 골프장, 테니스장 예약에도 매크로 기술이 동원되고 있다.

▶지난 6월 브루노 마스 내한 공연 때 예매를 시작하자 티켓 10만장이 순식간에 매진됐다. 예매 창이 닫힌 뒤 중고 거래 사이트에선 ‘그라운드 구역 8연석(붙어 있는 자리 8개) 1억8000만원에 판매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최근 가수 임영웅의 공연 표는 예매 시작 1분 만에 370만 접속이 몰렸다. 도처에서 수많은 매크로가 작동됐다는 뜻이다. 며칠 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티켓 예매도 예매 창이 열리자마자 순식간에 매진돼 야구 팬들이 온라인 암표상을 단속해 달라고 아우성이다.

▶제도 결함도 있다. 암표 단속 근거법인 경범죄처벌법은 1973년 제정됐는데 ‘흥행장, 경기장, 나루터 등 정하여진 요금을 받는 곳에서 웃돈을 받고 입장권을 다른 사람에게 되판 사람은 2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의형으로 처벌한다’고 돼 있다. 온라인상의 암표 행위는 처벌 대상에서 빠져 있다.

▶암표 거래를 차단하기 위해 공연기획사는 ‘본인이 본인 명의로 산 표’임을 입증해야 공연장에 입장할 수 있게 하는 방법도 동원한다. 그러나 암표상들은 암표 구매자가 원래 구매자인 것처럼 아이디를 조작하는 ‘아옮(아이디 옮기기)’ 서비스를 개발해 방패를 뚫고 있다. 내년 3월부턴 매크로를 이용해 사재기한 공연 티켓 판매를 금지하는 공연법 개정안이 시행되지만 암표상들은 고수익 장사를 포기하지 않을 것 같다. 콘서트 티켓은 무기명 채권에 가까운 만큼 미국처럼 예매 후 티켓을 자유롭게 판매하게 하고 세금을 물리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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