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형규칼럼] '알·테·쉬' 딜레마

황형규 기자(hwang21@mk.co.kr) 2023. 11. 8.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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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처럼 펑펑 써보라는
中직구몰 알리·테무·쉬인
'극초저가' 개척자인가
유통 생태계 교란자인가

도대체 얼마나 싸길래. 쇼핑 앱을 열고 눈에 띄는 대로 장바구니에 담아봤다.

'머플러·귀마개, 양말·티셔츠, 욕실용품, 미니 프린터와 스마트워치…'. 갖가지 생활용품과 의류, 전자제품까지 25가지 상품을 싹쓸이했는데, 듣던 대로 가격이 놀랍다. 총 98.5달러(12만8000원). 4인 가족 주말 외식 비용으로 황제처럼 쇼핑했다.

중국 직구(해외 직접구매) 쇼핑몰 테무. 5000만명 넘는 미국인이 찾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응사(응답하라 1994)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이다.

불량품이 있다는 얘길 들었지만, 한두 개쯤 나오면 어떠랴. (실제 주문을 하진 않았지만) 배송엔 10일 안팎이 걸린단다. 아마존처럼 총알 배송은 아니지만, 이 역시 무슨 문제랴. 쇼핑의 즐거움엔 기다림도 있는 법. 오기만 하면 상관없다. 직구몰은 이런 소비 심리를 꿰뚫었다. 테무가 미국에 문을 연 건 작년 9월. 초저가 입소문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타고 순식간에 퍼졌다. 몇 달 후 북미 최대 이벤트 슈퍼볼에서 본모습을 드러냈다. '억만장자처럼 쇼핑하라'는 자극적인 문구를 내걸고.

이자 부담에 허덕이고 고물가에 신음하던, 그러나 쇼핑은 포기하지 못하는 소비자들은 열광했다. 유튜브 광고 조회 수는 9억5000만회. 앱 다운로드 1위에 올랐다. 패션 직구몰 쉬인과 함께 테무는 아마존·월마트가 양분한 소비시장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테무·쉬인은 중국 판매자와 미국 소비자를 직접 연결한다. 수출입에는 통관 절차가 있고, 관세가 붙는다. 직구는 다르다. 태평양을 건너 문 앞까지 곧장 택배로 날아온다. 800달러까지(미국)는 세금이 없다. 억만장자처럼 쇼핑해도 한도를 넘기는 건 쉽지 않다.

생산·유통업계는 비상이다. "면세 제도는 미국 정부가 인정한 세계 최대 블랙마켓"이라는 불만이 들끓었다. 지식재산권 침해, 불법 악용 사례가 속출한다.

미국 의회는 심각성을 인지했다. 면세 제도를 없애거나, 중국을 제외시키자는 논의가 진행 중이다. 위구르 강제 노동 금지법을 위반했는지 조사에 들어갔다. 소비자 편익만을 고려해 시장 자율에 맡겨둘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다. 하지만 고물가 탈출구가 된 직구를 원천 차단하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중국 직구 플랫폼의 소비시장 침투는 글로벌 현상이 돼 가고 있다. 한국 역시 예외는 아니다. 아니, 더 심각하다. 인기 앱스토어 1, 2위는 이미 테무와 알리 차지다. 중국 제품 면세 한도는 150달러로 미국보다 한참 낮지만 '극초저가'의 허들이 되기엔 여전히 높다. 배송 시간도 미국보다 짧다.

상품 후기엔 혹평, 심한 경우엔 속았다는 반응도 있지만, 주문은 폭발적이다. 올해 9개월간 중국에서 직구로 들어온 상품이 2조2000억원어치나 된다. 직구 무역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중국에서 물건을 떼다가 수수료를 붙여 파는 수많은 업종의 상인들에겐 악몽이다. 국내 최저가를 외쳐왔던 온라인몰도 머쓱해졌다. '브랜드나 퀄리티로 승부하라'는 마케팅 개론은 한가하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 급하다. 유통 생태계가 흔들릴 판이다.

소비자들은 이미 주변 온·오프라인 소매점과 가격 비교를 시작했다. 미국의 한 소비자는 상품 후기에 이런 글을 남겼다.

"12.99달러(1만6800원)짜리 스마트워치를 샀다. 성능은 놀라울 정도다. 집까지 무료 배송. 8일이 걸렸지만 괜찮다. 아마존에서 파는 제품도 대부분 '메이드 인 차이나' 아닌가. 차이를 모르겠다. 가격 빼고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 것인가. 연중 최대 쇼핑시즌을 앞둔 유통업계의 잠 못 드는 밤이 시작됐다.

[황형규 컨슈머마켓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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