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귀한 몸’ 차량용 반도체, 이제는 남아돌아 고민
지난해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으로 인해 극심한 ‘신차 출고 대란’까지 빚었던 완성차 업계가 이제는 반도체 재고 과잉으로 고민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특히 글로벌 전기차 수요가 예상치를 밑돌면서 완성차 회사들의 창고에 반도체가 쌓이는 실정으로 전해졌다.
8일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네덜란드 반도체 제조사 NXP의 올해 3분기 차량용 칩 매출은 지난해 동기 대비 5% 미만으로 증가했다. 최근 3년간 가장 저조한 증가세다. 차량용 칩은 이 회사 연간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NXP는 4분기에는 자동차 반도체 매출 증가가 한 자릿수 중반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NXP는 “재고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력반도체를 생산하는 미국 기업 온세미도 최근 실적 발표에서 “올 4분기 매출과 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전력반도체는 배터리 전력을 공급할 때 생기는 손실을 제어하는 반도체로, 전기차에 탑재되는 핵심 부품이다.
주요 고객사로부터의 주문이 급격히 줄면서 온세미의 실리콘 카바이드 전력반도체 출하량도 20%가량 감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해당 고객은 전기차 제조사 테슬라로 알려졌다.
앞서 자동차 업계는 지난해까지 극심한 반도체 공급 부족을 겪었다. 코로나 19 확산으로 자동차 수요는 늘었지만 반도체 제조사들의 공급 물량은 줄어든 탓이다. 자동차용 반도체는 NXP(네덜란드), 인피니언(독일), 르네사스(일본) 등 중견기업 위주로 과점 구조가 짜여 있어 물량을 단기간에 늘리기 어렵다. 반도체 공급 병목 현상은 한동안 인기 신차 모델의 출고 기간을 1년 넘게 지연시키는 원인으로 지목돼 왔다.
하지만 차량 반도체 수급난은 현재 거의 완화된 상태다. 현대자동차·기아의 차종별 대기 기간을 보면, 지난해 반도체 부족 때문에 주문을 넣어도 출고까지 1~2년 가까이 걸리던 아반떼·그랜저·쏘렌토 같은 인기 차량의 대기 기간은 3개월 안쪽으로 대폭 감소했다.
완성차 기업들이 공격적으로 반도체 재고 확대에 나섰기 때문이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에 따르면 지난해 PC 등 가전제품 업계의 반도체 주문은 8% 감소했지만 자동차 업계의 반도체 주문은 오히려 16% 증가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그러나 자동차 제조업체는 재고를 영원히 쌓아둘 수 없다”며 “자동차 사업에서는 팔리지 않은 칩 더미를 정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전기차 소비 둔화로 업계 전반에 침체 분위기가 퍼지고 있는 것도 차량용 반도체 수요 감소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하지만 이 같은 재고 과잉은 일시적이라는 반론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마치 ‘움직이는 스마트폰’ 같은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SDV) 개념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차량 한 대에 들어가는 반도체 숫자는 빠르게 늘고 있다”며 “차량용 반도체 수요는 결국 회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범 기자 ksb123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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