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의 과학세상] 과학기술이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억지
과학기술이 돈만 쓰고 성과는 내지 못하는 ‘비효율의 끝판왕’이라는 위험한 억지가 기정사실로 굳어지고 있다.
연구개발 사업에 대한 투자는 GDP 대비 4.9%로 세계 최고인데 정작 과학기술 성과는 꼴찌인 현실을 ‘코리아 패러독스’라고 불러야 한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과학자들에게 ‘약탈적 이권 카르텔’이라는 구정물을 쏟아붓고 국가연구개발 예산을 2달 만에 5조2000억 원(16.6%)이나 싹뚝 잘라버린 것도 그런 엉터리 평가 때문이다.
과기정통부도 그런 지적에 공감하는 모양이다. 뒤늦게 과학자들이 국가연구개발비로 ‘누룽지 떡볶이’와 ‘과일 찹쌀떡’ 개발에 열을 올린다는 낮 뜨거운 언론플레이까지 시작했다. 이제 국가연구개발 사업에 사용하던 ‘연탄 보일러’를 완전히 바꿔서 ‘연구개발답지 않은 연구개발’은 확실하게 퇴출하겠다고 야단법석이다. 성과평가를 ‘상대평가’로 바꾸고 ‘성실 실패’를 확실하게 인정해주는 획기적인 제도를 내놓겠다는 것이다.
연구개발 사업의 평가는 고등학생의 내신이나 수능과는 완전히 다르다. 상대평가 중심의 대학입시 개혁안으로 공교육을 망쳐버리겠다는 교육부를 무작정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정부가 연구개발 사업의 20%를 ‘실패’로 낙인을 찍어버린다고 국가 연구개발사업이 하루 아침에 추격형에서 선진‧창조형으로 바뀌는 것은 절대 아니다.
성실한 실패를 인정해주지 않아서 많은 과학자들이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연구개발다운 연구개발’을 포기한다는 주장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소가 들어도 웃을 일이고 느닷없이 등장한 화성에서 온 선무당들이 떠벌리는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억지일 뿐이다.
● ‘K-과학기술’의 화려한 성과
우리 과학기술이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지적은 절대 납득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억지다. 1인당 국민소득 60달러였던 세계 최빈국(最貧國)을 반세기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갖춘 민주화된 선진국으로 우뚝 일으켜 세운 것이 바로 과학기술이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역사적 진실이다. 세계 최고의 기술이 만들어지는 선진국의 연구개발 현장을 어렵사리 기웃거리던 ‘우리 과학자’들이 ‘추격형 국제협력’으로 이룩한 혁혁한 성과다.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반도체‧배터리‧디스플레이‧자동차‧조선‧가전‧석유화학 등의 산업이 모두 그렇게 성장한 결과다.
모두 과거의 화려한 영광일 뿐이고 최근에는 ‘눈에 띄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도 황당한 것이다. 현대 기술의 수명은 놀라울 정도로 짧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아 지속적인 연구개발을 소홀히 하면 뒤처지는 정도가 아니라 영원히 퇴출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것이 현대 과학기술의 냉혹한 현실이다. 과학기술의 성과는 세계 최고의 산업현장에서 지금도 여전히 쏟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결국 우리 과학기술이 성과를 내지 못하고,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평가는 과학기술의 현장을 모르는 일부 ‘선무당’들의 무지에 의한 억지 평가다. 과학기술의 현장은 전혀 다르다.
그런 평가는 치열한 생존 경쟁의 현실을 우물 안 개구리의 좁은 소견으로 왜곡한 착각일 뿐이다. 반도체 시장의 경우가 가장 대표적이다. 우리의 반도체 기술은 여전히 세계 최고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 성과가 반도체에만 한정된 것도 아니다. 올해 노벨상을 받은 양자점(quantum dot) 기술의 상용화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 것은 우리 과학기술이다. 아직은 정체가 확실치 않은 ‘수소 기술’ 개발에 가장 뜨겁게 열을 올리고 있는 것도 역시 우리 과학기술이다.
LPG 운반선의 수주도 우리가 독점하고 있다. 정치적 목적의 탈원전으로 퇴출 위기에 시달리다가 ‘혁신형 SMR’로 부활을 시도하고 있는 원전 기술도 과학기술이 이룩해 낸 기적이다.
장기화되고 있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과 최근에 다시 시작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대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는 글로벌 방위산업의 현장에서 놀라운 성과를 내고 있는 ‘K-방위산업’도 사실은 과학기술의 성과다.
소총은 커녕 소총의 탄환도 생산하지 못했던 우리가 이제는 미국·러시아·프랑스·중국·독일·이탈리아·영국·스페인‧이스라엘과 함께 당당하게 ‘10대 무기수출대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지난 5년간 무기 수출 점유율에 따르면 그렇다. 수출 성장률이 74%로 14%의 미국, 44%의 프랑스를 확실하게 넘어서고 있다. 2020년 20억7000만 달러였던 K-방산 수출액이 작년에는 173억 달러를 기록했다.
수출 품목과 수출국도 놀라운 수준으로 다양해지고 있다. 이제는 소총이나 포탄은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실정이다. 2001년부터 수출을 시작했던 K9 자주포(튀르키예‧인도 등 8개국)를 비롯해서 K2 전차(폴란드), 레드백 장갑차(오스트레일리아), FA-50 경전투기(폴란드), 장보고 잠수함(인도네시아), 천궁II(아랍에미레이트) 등이 주요 수출 품목이다.
우리가 개발하고 있는 70여 종의 무기체계 중에서 30여 종의 기술력이 수출 가능한 수준을 넘어서는 놀라운 성과를 내고 있다. 심지어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대의 무기 강국인 미국에 최대 500대 규모의 해‧공군 고등훈련기를 수출하는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 국가연구개발 정책의 혁신
국가연구개발 정책의 현실은 화려한 혁혁한 성과를 내고 있는 K-과학기술의 현장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아직도 ‘추격형’과 ‘선진‧창조형’ 과학기술이 철 지난 ‘이념’이 충돌하고 있고 ‘기초‧원친‧응용’의 탁상공론에 포획되어 있다.
30년이 넘도록 출연연을 옥죄고 있는 어설픈 PBS(성과주의에산제도)의 개혁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과학기술 현장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턱없이 부족한 선무당이 만들어내고 있는 암울한 현실이다. 정작 근본적인 혁신이 필요한 것은 ‘과학기술’이 아니라 우리 몸에 맞지 않는 남의 제도나 베껴오고 있는 ‘추격형 과학기술 정책’이다.
설익은 과학기술 정책이 연구 현장에 미치는 폐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80년대 교육부의 ‘기초과학연구소 지원 사업’이 그 시작이었다. 전국의 모든 대학에 ‘기초과학(자연과학)연구소’를 급조했다. 실체는 없는 서류상의 조직이었다. 교육부가 지원한 연구비는 실험 500만 원, 이론 200만 원 수준이었다. 당시 ‘청계천 복제 XT’가 300만 원 하던 시절의 연구비가 그 정도 수준이었다.
과기정통부가 과학재단을 통해서 본격적인 연구비를 지급하면서 연구 현장에는 ‘공동연구’ 광풍이 불어닥쳤다. 혼자 하는 연구는 의미가 없다는 해괴망측한 주장이었다. 과학자가 개인적으로 원하는 ‘갈라파고식 연구’가 아니라 ‘연구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힌 ‘목적기초’ 연구에 집중해야 한다는 정책도 있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우리 학술지’는 모두 버리고 세계어인 영어를 사용하는 ‘국제학술지’가 필요하다는 엉터리 ‘국제화’ 요구도 등장했다. 고위 관료의 인사청문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가짜‧유사 학술지‧학술회의’ 논란의 단초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세계 최고’를 지향해야 한다는 정책도 있었다. 대학의 벽을 넘어선 ‘우수연구센터’도 만들었고 ‘창의적 연구’를 하는 과학자도 선정했다. 전국의 우수 대학원을 만들겠다는 ‘BK’(Brain Korea)는 ‘바보 코리아’로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월드클래스’의 대학‧연구원을 만들겠다는 정책도 있었다. 물론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한 엉터리 정책이었다. 심지어 노밸상 수상을 목표로 하는 ‘연구원’도 만들었고 이제는 정체도 불확실한 ‘글로컬’(Glocal) 대학이다.
유전자 가위 분야에서 세계 선두를 달리던 과학자를 어설픈 기술 가치 평가에 대한 혼란을 핑계로 퇴출시켜버린 일도 있었다. 과학자에게 연구를 잘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대신 과학자를 감시하고 견제‧관리하는 역할을 과학기술 정책이라고 착각하는 선무당급 전문가도 활개를 치고 있다.
과학자들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 중소기업의 육성을 위한 ‘보조금’ 지원사업을 연구개발 사업에 은근슬쩍 끼워 넣어 ‘연구개발 브로커’의 배를 채워주고 그 책임은 과학자에게 떠넘기고 있는 비겁한 관료는 확실하게 책임을 묻고 퇴출해야 한다. 누룽지 떡볶이와 과일 찹쌀떡 개발을 국가연구개발 사업으로 지원한 책임을 과학자에게 묻고 있는 현실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시대착오적이고 퇴행적인 ‘추격형 국제협력’도 과감하게 거부해야 한다. 쿼터를 채우는 목적으로 잘못 활용되고 있는 대통령실의 과학기술 인사 정책도 분명하게 개선해야 한다. 원로의 상식적인 발언을 카르텔로 왜곡해서 과학기술에 대한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를 어지럽게 만드는 참모는 아무 쓸모가 없다.
시대착오적인 ‘추격형 국제협력’도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성실한 실패를 들먹일 수 있는 한가한 상황도 아니다. 높은 말 안장에 올라앉아 매서운 채찍을 휘두르는 ‘과학기술 정책’에 길든 순한 양떼에게는 선진‧창조형 과학기술을 기대할 수 없다. ‘개방형 혁신’(open innovation)과 같은 낯선 구호만 앞세운 요란한 과학기술 정책에는 영혼을 내줄 수는 없는 일이다.
전국의 교사를 틀어쥐고 공교육을 망쳐버린 교육부의 망국적 행태를 흉내 내는 과기정통부는 존재 이유가 없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독특한 특성이 확실하게 반영된 ‘박인비식 우리 과학기술 정책’을 서둘러 개발해야 한다.
※필자소개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2012년 대한화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과학기술, 교육, 에너지, 환경, 보건위생 등 사회문제에 관한 칼럼과 논문 2900편을 발표했다.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번역했고 주요 저서로 《이덕환의 과학세상》이 있다.
[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duckhwan@sogang.ac.kr ]
Copyright © 동아사이언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