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 덕후·전쟁 영웅·동성애자…한국 초연 연극 ‘튜링 머신’
영국 수학자 앨런 튜링은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에 다니던 24세에 현대 컴퓨터의 이론적 토대가 된 ‘튜링 머신’을 내놓았다. 튜링 머신이란 계산하는 기계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가상의 기계이다. 튜링은 이 기계를 통해 수학적 증명과 인간의 사고 과정이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인간 수준의 생각하는 기계를 판별하는 ‘튜링 테스트’는 인공지능(AI) 이론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튜링의 기계 탐구는 인간 이해와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기자가 지난 5일 관람한 연극 <튜링 머신>은 앨런 튜링의 일생을 그렸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52년 튜링이 자신의 집에 강도가 들었다고 신고해 수사관 미카엘 로스의 조사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튜링은 로스에게 자신의 일생을 한 장면씩 들려준다. 가장 극적인 장면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39년 나치 독일의 악명 높은 암호 체계 ‘에니그마’를 해독했을 때다. 연극은 전쟁 승리에 기여했다는 쾌감보다 독일군을 속이려 일정한 사상자를 냈다는 죄책감에 무게를 둔다.
배우 고상호가 연기한 튜링은 더듬거리는 눌변에 항상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캐릭터였다. 탁월한 능력으로 엄청난 공을 세웠지만 평생 타인에게 이해받지도, 사회와 화해하지도 못한 괴짜의 모습을 꼼꼼하게 구현했다. 고상호가 얼굴을 허물어뜨리며 울듯이 웃는 처연한 표정은 마음 깊숙한 곳을 찔렀다. 배우 이승주는 수사관 미카엘 로스, 체스 챔피언 휴 알렉산더, 동성 애인 아놀드 머레이 3역을 번갈아가며 혼자 연기한다.
특이한 무대 구조가 눈에 띈다. 신유청 연출은 극장 4개 벽면에 모두 객석을 설치하고 무대는 한가운데 배치했다. 튜링의 삶과 관련된 사물인 사과, 에니그마, 체스판, 운동화 등에 핀 조명을 떨어뜨렸다. 고상호와 이승주는 객석 사이 통로를 통해 무대를 출입하고 아예 객석에 앉기도 한다. 무대를 객석까지 확장해 극장 전체를 튜링의 내면 세계로 만들고 그 안에 관객이 들어온 것처럼 느끼게 하려는 연출 의도로 보였다.
다만 두 배우가 마주 선 동선과 객석의 위치가 한 줄로 겹쳐 배우들의 연기와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장면이 종종 있었다. 배우가 관객을 똑바로 쳐다보거나 객석에 앉을 때도 연극 상황이라는 현실을 자각하게 됐다. 튜링의 세계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튜링에게서 떨어져 낯설게 바라보게 되는 연출이 이 작품에 잘 어울리는지는 의문이 들었다.
앨런 튜링을 철저히 고증한 작품은 아니다. 튜링은 파란만장한 삶 때문에 많은 작품에서 고독하고 우울하게 묘사됐지만 이는 창작된 캐릭터에 가깝다. 실제 튜링은 말솜씨와 유머감각이 뛰어나 인간관계가 좋았다고 한다. 수줍음이 많으면서도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알려졌다. 동성애 혐의 유죄판결을 받은 이유도 동성애를 숨기다 적발됐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평소 거침없이 말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작가·배우 브누아 솔레스의 작품으로 프랑스 연극상 ‘몰리에르 어워즈’ 4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한국에선 이번이 초연이다.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서울 U+스테이지에서 오는 25일까지. 공연 시간은 휴식 없이 90분. 모든 좌석 7만7000원이며 만 13세 이상 관람가다.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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