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오일 머니’, 세계 테니스마저 집어삼키나?[박준용 인앤아웃]
지난주 사우디아라비아가 마이애미오픈 또는 마드리드오픈 인수를 원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두 대회는 1년 중 9차례밖에 열리지 않는 1000시리즈 대회로 4대 그랜드슬램과 ATP파이널스에 이어 세 번째로 등급이 높은 대회다. 또한, 총상금이 수십억 원에 달하고 톱랭커 선수들이 의무적으로 출전하기 때문에 세계 테니스 팬들에게도 매우 인기가 높다.
최근 사우디가 세계 스포츠 시장에 쏟아붓는 ‘오일 머니’는 어마어마하다. 사우디는 자산 약 7000억달러(약 930조원)로 추정되는 국부펀드를 앞세워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알나스르), 카림 벤제마(알이티하드), 네이마르(알힐랄) 등을 자국 프로축구 리그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고 세계 골프계를 들썩이게 한 LIV 골프도 창설했다. 뿐만 아니라 지난 2021년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사들였고 2027년 아시안컵, 2029년 동계아시안게임, 2034년 월드컵과 하계아시안게임을 잇달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야말로 세계 스포츠가 사우디 오일머니에 점점 잠식되고 있는 모습이다. 이처럼 사우디가 세계 스포츠 시장에 천문학적인 자본을 투자하는 이유는 사우디 경제의 석유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지난 2016년 왕세자 빈살만이 발표한 ‘비전 2030’의 일환이다.
이제 막대한 사우디의 오일머니가 세계 테니스 시장에도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사실, 사우디는 내세울 만한 테니스 선수가 없을 정도로 테니스 변방국과 다름없다. 그나마 매년 12월 이벤트 대회인 ‘디리야 테니스컵’을 개최한 것이 전부였는데 최근 사우디가 세계 테니스를 향한 행보가 심상치 않다.
매년 7월 US오픈 웜업대회로 열렸던 ‘씨티오픈’이 올해 사우디 자본이 투입되면서 대회 명칭이 ‘무바달라 씨티DC 오픈’으로 변경됐고 21세 이하 최강자를 가리는 넥스트 젠 ATP파이널스도 향후 5년간 사우디 제다에서 개최하기로 하면서 총상금이 기존 140만달러(약 18억 3천만원)에서 200만달러(약 26억2천만원)으로 대폭 상승됐다. 또한, 올 시즌 WTA파이널스 개최를 앞두고 멕시코 칸쿤과 경쟁을 펼치기도 했다. 비록 개최권이 칸쿤에게 넘어갔지만 1년 단기 계약이기 때문에 내년에 사우디에서 WTA파이널스를 개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사우디가 정조준을 하고 있는 것은 WTA이다. 지난 2021년 중국 테니스 스타 펑솨이가 장가오리 전 부총리로부터 성폭행당했다는 의혹의 불거지면서 WTA는 중국과 홍콩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투어 대회를 모두 중단했다. 2011년 프랑스오픈에서 중국의 리나가 아시아 선수 최초로 그랜드슬램 우승을 차지하면서 중국은 WTA의 큰 손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와 펑솨이의 성폭행 의혹으로 중국 투어 대회가 중단되자 WTA의 재정이 악화됐다. 올해부터 중국 WTA투어 대회가 재개되었지만 손실을 메꾸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데 그 틈을 사우디가 노린 것이다. 만약, 사우디 오일머니가 WTA에 유입되면 WTA의 오랜 꿈인 투어 남녀상금 평등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현재 4대 그랜드슬램만 남녀 상금이 같다.
그동안 투어 대회가 막대한 자본으로 주인이 바뀐 사례가 몇 차례 있었다. 현재 ATP투어 500시리즈로 열리고 있는 함부르크오픈은 원래 1000시리즈 대회였는데 중국 자본에 무릎을 꿇으면서 500시리즈로 강등되었고 그 자리를 상하이마스터스가 차지했다. 지난 2014년 일본에서 30년간 열린 토레이 팬 퍼시픽오픈도 중국 우한으로 넘어갔다. ATP와 WTA 입장에서는 든든한 자금력을 보유한 곳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사우디가 테니스 포함 막대한 자본을 세계 스포츠에 투자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여성 인권 및 언론 탄압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스포츠를 후원함으로써 세탁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는데 테니스 역시 ‘스포츠 워싱(Sports Washing)’의 희생양이 되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사우디가 LIV골프 창설 당시 PGA와 갈등을 빚은 것처럼 사우디가 주도하는 테니스 리그가 등장하면 세계 테니스 생태계 역시 흔들릴 수 있다는 점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여러 우려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빈살만 왕세자는 아랑곳하지 않을 것임은 확실하다. 마치 블랙홀처럼 세계 스포츠를 빨아들이고 있는 사우디가 테니스마저 뒤흔들지 기대와 우려의 시선이 교차하고 있다.
<박준용 테니스 칼럼니스트, SPOTV 해설위원(loveis55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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