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값 올리고 가계대출 늘린 금융 실패[이철호의 시론]
日처럼 ‘금융 노예’ 양산 우려
DSR 우회한 정책 대출이 주범
기준금리 인상 효과도 무력화
원죄는 문재인 정부에 있지만
사태 악화시킨 현 정부도 잘못
훨씬 정교해져야 할 금융정책
부동산과 가계대출의 이상 신호가 심상치 않다. 지난 3일 기준으로 서울의 아파트 매도 물량은 사상 최대인 8만여 채다. 경기 14만여 채, 부산 5만여 채도 매도 물량 신기록이다. 반면, 거래량은 절벽이다. 급매물만 팔린다. 지난 9월까지 월 3000건을 웃돌던 서울 아파트 거래량은 1407건으로 반 토막 났다. 대출 금리가 7%를 웃도는 고금리에도 과도한 정책 대출로 집값이 올라버려 심각한 호가 공백이 생긴 것이다.
지난 10월 5대 은행의 가계대출 잔액은 전월 말 대비 3조6825억 원 증가했다. 증가분의 무려 91%(3조3676억 원)가 주택담보대출이었다. 대출 안전장치인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을 우회하는 주담대가 봇물 터지듯 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반 년간 늘어난 주담대 34조 원 가운데 절반 가까운 15조 원이 정책 모기지 대출이었다. 금융위원회가 9월 말부터 뒤늦게 제동을 걸었지만, “대출 막차라도 타자”는 관성의 법칙까지 작용했다. 가계부채와 부동산의 적신호는 금융정책 실패의 결과물이다.
한국은행은 2021년 11월부터 기준금리를 올렸다. 이창용 총재는 2022년 4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지금 가계부채를 꺾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한국의 가계부채와 집값을 콕 찍어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DSR 40% 규제’ 완화를 내걸면서 스텝이 꼬였다. 결정적으로 그해 6월 윤석열 대통령이 ‘은행 돈잔치’를 질타하면서 역주행이 본격화했다. 금융 당국이 대출금리를 누르자 주담대 금리는 연 3%대(하단 기준)로 떨어졌다. 금융위의 엇박자 때문에 한은의 통화정책 효과는 무력화됐다. 기준금리를 올려도 가계부채가 늘고 부동산 시장은 연착륙을 넘어 과열로 치달았다. 시장에는 정부가 집값 하락을 방치하지 않을 것이란 맹신이 퍼졌다.
금융 당국도 이런 가계대출·부동산 혼선의 주범으로 특례보금자리론과 50년 만기 주담대를 꼽았다. 특례보금자리론은 대표적인 DSR의 구멍이다. 소득에 관계없이 4%대 금리로 최대 5억 원까지 빌려주고, 규모도 39조 원으로 어마어마했다. 당초 부채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고정금리 대환 대출’이 중심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59%가 신규 주택 구입에 나갔다. 특히, 연 소득 9000만 원이 넘는 사람들에게 7조 원 이상 대출된 게 역린을 건드렸다. ‘고소득층 내 집 마련 대출’이란 비난을 자초했다. 비난의 도마에 오른 것은 50년 만기 주담대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4월, 30년 만기를 40년으로 확대한 뒤 불과 1년 만에 다시 50년으로 만기를 늘린 것이다. 사실상 DSR이 크게 완화되자 8월 한 달간 무려 2조 원 넘게 대출이 폭발했다. 금융 당국은 부랴부랴 출시 2개월 만에 제동을 걸었다.
과거에는 전세 살면서 종잣돈을 모아 40대쯤 ‘내 집’을 마련했다. 요즘 2030세대는 다르다. 주택을 금융 상품으로 인식해 금리와 정부 정책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집값이 오를 조짐을 보이면 주저없이 은행 대출을 받아 공격적으로 주택을 구입한다. 이렇게 바뀐 만큼 금융정책도 정교하고 치밀해야 한다. 더 이상 정치에 압도될 시대가 아니다. 일본도 1990년대의 금융정책 실패로 ‘잃어버린 30년’을 겪었고, 젊은 세대는 주택 대출금을 갚다가 늙어가는 비극을 맞았다. 스스로 ‘금융 노예’라 불렀다.
시나브로 윤석열 정부의 ‘자유시장경제’ 깃발은 색이 바래고 있다. 그 한 단면이 물가 단속이다. 윤 대통령이 “물가 안정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하자 기획재정부가 총대를 멨다. ‘인플레 파이터’가 항상 중앙은행 총재인 미국·유럽과는 다른 풍경이다. 우리도 법에는 물가 안정을 한은의 책임으로 못 박아 놓았지만, 기재부의 ‘빵 과장’ ‘라면 사무관’이 가격을 때려잡고 있다. 시장은 멍들고 물가는 안 잡힌다. 가계부채와 부동산 문제도 마찬가지다. 물론 문재인 정부의 원죄가 압도적이지만, 그걸 해결하라고 정권을 바꿨는데도 윤 정부 역시 사태를 악화시키는 게 문제다. 금융정책에선 똑같이 무능하다. 정부 개입은 능사가 아니다. 시장 실패를 바로잡기 위한 정부 개입이 오히려 자원 배분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것을 ‘정부 실패’라 한다. 지난 1년 금융정책의 파행만큼 분명한 정부 실패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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