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광장] 재정개혁이 시급하다
기획재정부의 ‘월간 재정동향(10월호)’에 따르면 8월 말 중앙정부 채무는 1110조원으로 나랏빚이 사상 처음으로 1100조원을 돌파했다. 여기에 지방정부 채무까지 더하면 국가채무는 1144조2000억원으로 불어나 올해 말 예상치인 1134조4000억원을 넘어섰다. 더군다나 빠르게 늘어나는 공기업·공공기관 채무도 함께 고려하면 정부의 재정 역량은 급속도로 쪼그라들고 있다. 나라 살림을 보여주는 관리재정수지도 부동산 거래 감소와 기업실적 악화 등으로 인해 국세수입이 급감하면서 66조원 적자로 정부의 연간 전망치(58조2000억원 적자)를 크게 웃돌아 재정건전성 악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나랏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은 주로 문재인 정부 임기 동안 복지 확대와 코로나19 위기 대응을 위한 확장 재정으로 국가채무가 400조원 넘게 늘어난 여파가 크다. 대규모 초과세수가 발생한 지난 2021년과 2022년에도 국가채무가 감소하기는커녕 오히려 빠르게 증가했다는 사실은 재정지출의 중독 위험성을 보여준다. 다른 선진국들은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대폭 늘어난 재정지출을 감축하면서 재정건전성 확보에 성과를 내고 있다. 반면 한국은 국가채무 증가 속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인 데다 저출산·고령화의 심화로 재정지출 압박이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여서 재정건전성이 매우 우려되는 상황이다.
재정건전성은 국가채무를 적정한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채무 상환능력을 갖춘 재정 상태를 의미한다. 재정의 역할은 경기가 괜찮을 때 아껴 쓰다가 미래에 경제위기가 발생하면 나랏돈으로 해결하는 것인데, 재정건전성이 무너지면 정부가 안팎으로 손발이 묶이는 재난적 상황에 처하게 된다. 국가채무가 적정 수준을 넘으면 국가신용도 하락과 자본유출 압력이 커지고, 과도하면 국가부도로 이어진다. 당장 내년에는 국세수입의 95%를 국가가 줄일 수 없는 의무지출에 써야 해, 재정의 원래 역할인 경기 대응성이 잠식되는 것은 물론 재정의 지속가능성도 위험에 처하게 된다. 특히 ‘퍼펙트 스톰(복합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한국 경제에서 재정은 최후 방어선이므로 재정건전성 회복을 위한 재정개혁이 시급하다.
첫째, 과감한 예산 구조조정과 불요불급한 재정지출을 막아야 한다. 예산 지출항목 중에서 유사·중복된 예산을 통폐합하고 복지지출 효율화와 인구 감소에 따른 교육지출 감축 등으로 의무지출을 줄이는 과감한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최근 일각에서 경제 위기론을 제기하며 정부지출 확대를 주장하고 있지만, 확대재정은 단기적으로는 통화정책 효과를 반감시켜 고물가를 지속시키고 장기적으로는 성장세 저하를 유발한다. 게다가 한때 ‘3.3배’를 웃돌았던 재정지출승수는 ‘0.8배’ 내외로 줄어들어 재정지출의 효율성도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재정건전성을 위해 불요불급한 재정지출은 최소화하되, 취약계층 지원과 R&D 분야 등 미래 성장동력 투자는 지속해야 한다.
둘째, 국회에서 수년째 방치되고 있는 재정준칙의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전 세계 105개국이 재정준칙을 도입하고 있지만 OECD 회원국 중 재정준칙이 없는 나라는 한국과 튀르키예뿐이다. 국가채무가 급증하지 않도록 재정적자와 국가채무를 국내총생산(GDP)의 일정범위 내에서 관리하는 재정준칙의 법제화가 필요하다. 재정준칙의 법적 근거는 가능한 최상위법에 두고 관리기준은 엄격히 규정하고 적용해야 하며, 위반할 때에는 강력한 제재가 뒤따라야 한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정부안은 재정준칙의 적용 예외를 인정하는데 추상적인 ‘예외 요건’을 구체화하고, 초과세수가 발생할 경우 국가채무 상환 의무비율을 상향 조정해야 한다.
셋째, 과도한 재정 부담을 유발하는 국회의 ‘정치 예산’ 입법을 통제해야 한다. 지난해 국회 문턱을 넘은 법안으로 올해부터 2027년까지 5년간 늘어나는 재정 부담은 총 91조7635억원으로 집계됐다. 여야 간 ‘빅딜’로 올 상반기 동시에 국회 문턱을 넘은 대구·경북(TK) 신공항 특별법, 광주 군공항이전 특별법 등이 대표적이다. 재정준칙만으로 국회를 견제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별도로 과도한 재정지출을 유발하는 입법을 제한하는 통제수단이 필요하다. 특히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의 포퓰리즘 입법이 폭증할 우려가 크므로 이를 선별·규제할 통제장치 관련 입법이 시급하다.
넷째, 한국은 기축통화국보다 철저한 재정관리가 필요하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공공부문 부채 리스크가 확대되고 있는데 한국은 기축통화국이 아닌 만큼 더 깐깐한 관리가 요구된다. 기축통화국의 경우 국가채무 비율이 높아도 스스로 화폐를 찍어 나랏빚을 갚을 수 있는 반면, 한국 같은 비기축통화국은 나랏빚이 많으면 화폐가치가 폭락해 달러와 같은 기축통화를 구하지 못하면 1997년 외환위기처럼 국가부도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한국의 국가채무 비율은 다른 선진국보다 적은 편이지만, 늘어나는 속도가 빠르고 저출산·고령화 문제가 심각한 만큼 기축통화국보다 엄격한 재정준칙을 마련하는 등 재정관리를 강화해야 한다.
강명헌 단국대 명예교수 전 금융통화위원
pin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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