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마지막 왕은 의자왕이 아니다[이기환의 Hi-story](107)
‘660년? 663년?’ 백제는 언제 멸망했을까요. 무슨 뜬금없는 질문이냐고요? 660년이라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배우지 않았냐고요. 하지만 과연 660년이 맞을까요. 663년설도 제법 설득력이 있거든요. 또 하나 착안점이 있습니다. 백제의 독립투쟁이 672년까지 이어진다는 겁니다.
마침 올해(2023)가 백제금동대향로의 발굴 30주년입니다. 게다가 며칠 전에 부여 가림성에서 백제~통일신라시대의 유구가 확인됐다는 조사결과가 발표됐습니다.
또 10월 20일 세종시 운주산 기슭에서 의미심장한 행사가 벌어졌는데요. 660년 이후 3년간 벌어진 ‘백제부흥운동’에 참전했다가 목숨을 바친 백제부흥군·왜 연합군의 넋을 기리는 백제고산대제가 열렸습니다. 백제군의 최후 보루였던 주류성 함락일에 맞춰 봉행돼 왔는데요. 올해로 꼭 30년이 됐답니다.
금동대향로에 읽힌 멸망사
백제 멸망과 금동대향로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아볼까요. 금동대향로는 1993년 12월 12일 밤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극적으로 발굴된 것으로 유명한데요. 이 금동대향로는 사찰의 공방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던 구유형 목제 수조가 놓여 있던 곳에서 출토됐습니다.
이상한 일이죠. 왜 향로가 나무물통 안에 숨겨져 있었을까요. 여기서 상상의 나래를 펴봅시다.
즉 660년(의자왕 20) 나당연합군의 공세에 사비(부여)가 함락됩니다. 승려들은 백제가 멸망하리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향로를 공방터 물통 속에 감춰두고 도망쳤습니다. 며칠이면 다시 돌아올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오판이었습니다. 백제는 그 길로 속절없이 멸망합니다. 나당연합군은 나라 제사를 지내던 이 절을 불에 태웠고요. 공방터 지붕도 폭삭 무너졌습니다. 금동대향로도 이후 1300년 이상 묻혀버린 겁니다. 허언이 아닙니다.
2년 뒤 이 사찰터의 목탑지 중심기둥이 도끼와 같은 흉기로 처참하게 잘린 채 확인됐어요. 명문 사리감도 비스듬히 넘어져 있었고요. 절을 유린한 나당연합군의 소행으로 보입니다. 백제의 멸망은 그야말로 창졸지간이었습니다.
소정방(592~667)이 이끄는 13만 당나라군이 덕물도(덕적도)에 도착한 게 6월 21일이고요.
이후 황산벌 전투 및 나당연합군 본격 합류(7월 9일)-연합군 사비 진격(12일)-의자왕의 사비 탈출 후 웅진(공주) 피신(13일)-의자왕 항복(18일)까지…. 황산벌 전투부터 따지면 단 9일 만에 항복했습니다.
이로써 백제 678년의 역사는 공식적으로 종막을 고하게 됐고요.
9월 3일 소정방은 의자왕과 왕족·신료 93명, 그리고 백성 1만2000명을 당나라로 끌고 갔습니다. 왕조의 기둥을 뿌리째 뽑아간 형국이었죠. 백제는 그러나 그리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가열찬 부흥운동
이때부터 가열찬 부흥투쟁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당나라군이 철수하기도 전인 8월부터 항거의 움직임이 일더니 전(前) 좌평 정무가 두시원악(청양)을 근거로 나당연합군을 습격합니다.
부흥운동의 중심인물은 무왕(재위 600~641)의 조카인 원로왕족 복신(?~663)이었습니다. 복신은 660년 9월 초 승려 도침(?~661)과 함께 주류성을 근거지로 본격적인 부흥운동에 나섭니다.
당나라 장수 유인원(생몰년 미상)의 공적을 기리려고 충남 부여에 세운 <당유인원기공비>(보물)도 “도침과 복신이 벌처럼 모이고 고슴도치처럼 일어나 산과 골짜기에 가득 찼다”고 했습니다.
거병 초기 독자적으로 활동했던 부흥군이 복신의 휘하로 결집하고 있었습니다.
“흑치상지(630?~689)가 별부장 사타상여(생몰년 미상)와 함께 복신에 호응했다”(<삼국사기> ‘백제본기·의자왕조’)는 기록이 이를 증명합니다. 부흥군이 임존성(충남 예산)을 확보하자 10일도 되지 않아 3만명이 모였습니다. 곧 주변의 200여개 성도 호응했답니다. 사비성에 주둔하던 나당연합군은 부흥군에 의해 고립되는 등 큰 곤욕을 치렀습니다.
‘빨리 당으로 돌아가라’는 부흥군의 조롱
그사이 변수도 생깁니다. 당나라가 주적인 고구려 침략전쟁에 전념하는데요. 신라에는 평양까지 군량미 수송의 임무를 맡겼거든요. 그러자 백제부흥군의 운신이 자유로워집니다.
그런데 661년 6월~662년 2월 당나라군이 고구려와의 혈투에서 패했습니다. 당나라는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당나라 고종(재위 649~683)은 백제 고토에서 부흥군에게 포위당해 있던 웅진도독 유인궤(602~685)에게 칙서를 내립니다.
“형편이 어려우니 신라땅으로 가거나, 혹은 귀국해도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구당서>는 “백제땅에 주둔하던 당나라군의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귀국하기를 원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유인궤는 그러나 “웅진의 군대마저 뽑아버리면 백제가 다시 일어설 것인데, 고구려는 언제 멸망시키겠느냐”고 백제 주둔을 고집했습니다.
이 무렵 백제부흥군의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부흥군 지도자인 도침은 유인궤가 보낸 사신에게 ‘신분이 낮아 만나 줄 수 없다’고 홀대했고요. 복신은 당군 사령관 유인원에게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라. 우리가 전송해주겠노라”고 조롱했답니다(<삼국사기>). 실제로 662년 7월 당시 당나라군이 장악한 백제의 고토라고 해봐야 웅진성 정도였습니다.
백제 32대 ‘풍왕’ 등극
드디어 백제부흥군은 새로운 왕국의 면모를 갖췄습니다(661년 9월). 복신 등은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풍장)을 백제의 새 임금으로 옹립했어요. 백제가 의자왕의 항복 이후 1년여 만에 새로운 임금(풍왕)을 내세워 부활한 겁니다. 풍왕의 등장과 함께 부흥백제국의 정통성이 확립된 셈이죠.
그래서 백제의 마지막 왕이 의자왕(재위 641~660)이 아니라 풍왕(재위 661~663)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실제로 순암 안정복(1712~1791)은 <동사강목>에서 ‘백제의 32대 왕=풍왕’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내부 분열의 씨앗이 자랐습니다. 부흥운동을 이끈 동지(복신과 도침)가 이제 풍왕의 신하로서 경쟁하는 사이가 된 거죠. 결국 복신은 도침을 죽인 뒤(661) 풍왕까지 제거할 계획을 세웁니다(663년 6월).
하지만 복신의 반란 음모를 알아차린 풍왕이 선제공격에 나서 복신을 급습해 죽입니다. 내부 분열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일본서기>는 “663년 8월 백제가 복신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가 곧장 백제를 공격해 주류성(부흥군의 최후 거점)을 취하고자 했다”(‘천지기’)고 했습니다. 병선 170척으로 무장한 당나라군도 합류했습니다.
“주류성이 함락됐다. 백제의 이름이 끊겼다”
위기에 빠진 풍왕은 왜에 구원병을 요청했고요. 마침내 왜군 1만여명이 수송선 1000여 척에 나눠타고 백제로 달려옵니다. 663년 8월 마침내 한반도 남부 서해안의 백강구(백촌강·백강)에서 대규모 해전이 벌어집니다.
백제-왜가 한편이 되고, 신라-당나라가 한편이 돼 치른 동북아시아 국제전의 막이 오른 겁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자치통감> 등은 저마다 이 처절한 해전을 생생한 필치로 전합니다.
“왜·백제 연합군이 백촌강에 진을 친 당나라군과 잇달아 접전을 벌였지만 실패했다. 당나라군의 포위 공격에 물속에 떨어져 죽은 자가 많았으며, 뱃머리를 돌릴 틈도 없었다.”(<일본서기>)
“…당나라 수군이 백강에서 왜병을 만나 4번이나 싸워 모두 이겼고, 왜선 400척을 모두 불태워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으며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다.”(<자치통감>)
당나라가 수전을 펼치자 신라군은 당나라군의 선봉이 되어 육지(주류성)에서 백제의 정예기병을 깨뜨렸다.”(<삼국사기>)
전투는 백제·왜 연합군의 궤멸로 끝났습니다. 부흥군을 이끌던 풍왕은 몇몇 측근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망명했습니다. 마지막 보루였던 주류성은 9월 7일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3년여에 걸친 백제의 부흥운동이 막을 내립니다.
<일본서기>는 “주류성이 함락되자 백제인들이 서로 부여잡고 피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주류성이 항복했구나. 돌이킬 수 없구나. 이제 백제의 이름이 끊기니 (조상의) 무덤을 어찌 가볼 수 있을 것인가(州柔降矣 事無奈何 百濟之名 絶于今日 丘墓之所 豈能復往)”(<일본서기> ‘천지기’).
백제의 독립투쟁
이후에도 백제 유민들의 무장독립투쟁이 이어집니다. 664년 3월 백제 독립군이 사비산성(부소산성)을 점령했다가 당나라의 웅진도독부에 의해 진압되기도 했습니다(<삼국사기> ‘문무왕’조).
최근 백제-통일신라 유구·유물이 확인된 ‘가림성’은 672년까지 백제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삼국사기>는 “671년(문무왕 11) 6월 신라가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가림성의 벼를 밟도록 했다”고 했습니다. 백제 독립군의 군량미 확보를 사전에 막으려고 한 고육책이었죠. 그럼에도 가림성은 신라의 수중에 들어오지 않았답니다.
<삼국사기>는 이듬해인 672년(문무왕 12) 2월 “백제 가림성을 쳤지만 이기지 못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백제의 독립운동은 끝내 결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고립무원이었던 백제인들의 독립투쟁은 외로운 싸움이었던 겁니다.
부흥백제국의 도읍, 주류성은 어디인가
다시 한 번 질문해봅시다. 660년 7월 의자왕의 항복 때일까요. 아니면 663년 9월 주류성 함락 때일까요. 어떤 연구자는 전한·후한, 서진·동진처럼 백제(기원전 18~기원후 660년)와 부흥백제국(661~663)으로 구별하기도 합니다. 이후 9년간은 독립운동기였고요. 또 하나 궁금증이 남죠. 주류성이 이른바 ‘부흥백제국’이라 이름 붙일 경우 주류성은 그 ‘부흥백제국’의 도읍이었겠네요. 주류성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알쏭달쏭합니다.
<삼국사기> ‘지리지’는 “주류성은 ‘이름은 있지만, 위치 불명 지역(三國有名未詳地分條)”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정확한 위치를 두고 설왕설래하고 있습니다. 30년 동안 고산대제를 지내고 있는 세종 운주산성도 그중 한 후보지로 꼽히고 있고요. 충남 홍성 학성산성, 한산 건지산성, 연기 당산성, 전북 정읍 두승산성, 부안 우금산성(위금암산성)도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거다!’ 하고 단정할 만한 증거자료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가림성 사랑나무의 깜찍한 스토리
요즘 백제 부흥군과 독립군의 최후 근거지 중 한 곳이 요즘 MZ세대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는데요. 바로 ‘가림성 사랑나무’입니다. 저도 MZ세대 흉내를 내보려고 ‘가림성 사랑나무’를 찾아갔는데요. 해발 260m의 가림성 남문 터에 올라보니 우뚝 솟아 있는 나무와 함께 가슴이 확 트이는 ‘뷰’가 펼쳐지더군요. 부여 시내는 물론이고 논산, 강경, 서천, 익산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더라고요.
그곳에 서 있는 나무에 왜 ‘사랑’ 자가 붙었을까요. 사랑나무는 키 22m, 가슴둘레 5m40㎝에 달하는 느티나무인데요. 원뿔 모양의 몸집에 판 모양으로 돌출된 거대한 뿌리 등이 늠름한 자태를 풍깁니다. 수령이 440년 정도라 하고요. 천연기념물로 지정됐습니다(2021년 8월).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왜 나무에 ‘사랑’ 자가 붙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옆으로 퍼진 나무줄기를 보면 뭔가 하트 모양 같기도 하지만 완전치 못했거든요. 이상했는데요. 다시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보고 깨달았습니다. 본래가 반쪽짜리 하트 문양 나뭇가지였는데요. 이것을 합성해 온전한 하트 문양을 만든다는 겁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이런 센스쟁이들이 있나!’ 하기야 요즘 누가 몇백 년 몇천 년 된 고리타분한 유적·유물을 보러오나요. 사진찍기에 좋은 ‘뷰’를 찾고, 분위기 좋은 카페 찾고, 볼거리 많은 거리나 길을 찾죠. 경주 황리단길과 벚꽃길을 한번 보십시오. 부여 역시도 왕릉원이나 박물관보다는 ‘가림성 사랑나무’가 ‘인생샷’을 찍는 핫스팟으로 각광받는 거겠죠.
그래도 저는 옛날 사람인 모양입니다. 사랑나무를 보면서도 백제 멸망이 어떻고, 부흥군이 어떻고, 독립군이 어떻고 하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나 하고 있으니까요.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I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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