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터뷰]'사회파' 정지영이 '소년들'로 재확인한 정의

CBS노컷뉴스 최영주 기자 2023. 11. 8.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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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요약
영화 '소년들' 정지영 감독
삼례나라슈퍼 사건 재심 과정 다룬 실화극
영화 '소년들' 정지영 감독. CJ ENM 제공
※ 스포일러 주의

법정 실화극 '부러진 화살', 금융범죄 실화극 '블랙머니'를 통해 우리 사회의 이면과 부조리를 통찰하고 비판해 온 정지영 감독이 또 다른 실화극 '소년들'로 돌아왔다. 정 감독이 이번에 선택한 실화는 '삼례 나라슈퍼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조작된 자백과 진실을 향한 재심 과정이다.

1999년 전북 완주군 삼례읍의 한 슈퍼에 3인조 강도가 침입해 주인 할머니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 9일 만에 동네 소년 3인이 사건 용의자로 검거되고 범행 일체에 대한 자백과 함께 수사는 일사천리로 종결된다. 그러나 모든 증거와 자백은 조작된 것이었고, 소년들은 살인자로 낙인찍힌 채 억울한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사건'이다.

2000년 6월 소년 중 한 명이 1차 재심 청구를 하며 시작된 진실을 향한 여정은 2016년 11월 4일 검찰의 항소 포기로 최종 무죄판결이 확정된다. 여기까지가 '재심'이다. 정 감독은 바로 사건의 시작부터 재심 확정판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123분에 압축해 그려냈다.

사회의 구조적 취약함이 억울한 이들을 만들어 냈고, 진범으로 몰려야만 했던 소년들을 포기하지 않고 큰 용기를 내 당당히 '무죄'를 받아냈다. 개봉을 앞두고 만난 정 감독은 왜 지금 우리에게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는 '소년들'의 외침을 전해야만 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영화 '소년들' 스틸컷. CJ ENM 제공

'소년들'의 외침이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이유

 
정지영 감독이 2023년 관객들에게 들려주고자 한 건 하루아침에 무고한 소년들이 범인으로 조작된 사건의 실체와 그 이면의 진실을 추적하는 이야기다.

정 감독은 "시대 윤리가 어떻게 변했는지 몰라도, 각자도생의 시대로 가면서 마치 힘 있는 자가 약한 자 위에 군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윤리가 과연 옳은 윤리인가"라고 반문하며 "그런 측면에서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이야기 아닌가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조사 과정에서 특히 진범과 소년들의 대질 신문 당시 진범 중 한 명이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에 놀랐다. 정 감독은 "가짜 범인인 아이들은 공포와 두려움, 억울함에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며 "그러나 진범 중 한 명이 눈물을 흘렸다는 건 자신을 거짓으로 포장해 준 것을 인정한다는 데 양심의 가책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상당히 인상 깊었다"고 이야기했다.

영화 '소년들' 스틸컷. CJ ENM 제공

이처럼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만큼 자료 조사를 통해 있는 그대로 사실을 전달해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했다. 정 감독은 "제일 조심스러운 게, 팩트를 기반으로 인물과 상황은 변형할 수 있지만 사건의 본질을 왜곡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며 "상당히 조심스럽게 접근했다"고 말했다.

이어 "있는 사실을 진정성 있게 접근하다 보니 약간 재미가 떨어질 수는 있다"며 "그렇기에 팩트를 갖고 영화를 하면서도 대중의 호흡을 잡기 위해 극적인 장치를 도입해야 한다. 난 그걸 고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

또한 실제 일어났던 일인 만큼 당시의 이야기가 영화로 재구성돼 다시금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사건 당사자들에게 상처가 되진 않을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정 감독은 "다행히도 전주에서 시사할 때 그 중 한 사람이 왔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나한테 '감사합니다'는 메시지와 함께 꽃다발을 전해줬다. 가슴이 뭉클했다"고 말했다.

영화 '소년들' 스틸컷. CJ ENM 제공
 

정지영 감독이 말하는 클라이맥스

 
정지영 감독은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된 사건의 전말을 관객들이 몰입해서 들여다볼 수 있도록 정의롭고 열정적인 형사 황준철 반장이라는 인물을 설정했다. 그리고 정 감독의 마음속 황 반장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배우 설경구였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설경구를 떠올리며 황 반장을 만들어 나갔다.

정 감독은 황 반장 캐릭터를 두고 "무모하게 대드는 점에서 강철중 캐릭터를 생각했다. 황 반장은 모든 사람이 말리는데도 끝까지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다가 쫓겨난다"며 "그것만 생각하고 캐릭터를 구축했다"고 이야기했다.

이러한 황 반장과 대척점에 놓인 인물이 바로 배우 유준상이 연기한 수사계장 최우성이다. 최우성은 엘리트 경찰다운 확신으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소년들을 범인으로 지목, 단서라고는 보이지 않던 우리슈퍼 강도치사사건을 일사천리로 해결해 초고속 승진했다. 자신의 자리에 반장으로 부임한 황준철이 이미 다 끝난 사건을 들쑤시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정 감독은 유준상을 캐스팅한 이유에 관해 "악역의 얼굴이 '저 사람이 나쁜 놈 같다'고 하면 요즘 트렌드에 안 맞다고 생각했다"며 "그래서 모범생 같고 착한 얼굴, 남들이 볼 때 호감 가는 얼굴을 가진 배우를 찾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화 '소년들' 스틸컷. CJ ENM 제공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사건을 바로잡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따라가다 보면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법정에 다다른 이들을 만날 수 있다. 소년들의 무죄 여부가 갈리는 법정을 연출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힘들었던 점은 마무리였다.

정 감독은 "어떻게 연출할지, 콘티를 어떻게 끌고 가야 할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현장에서 리허설할 때 세 아이(배우 김동영, 유수빈, 김경호)가 어떻게 할 것인지 끝까지 가만히 봤더니 속 시원하게 '나는 살인자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처음에는 너무 오버 아닌가 싶어 약간 거부반응이 있어서 고민을 좀 해봤다"며 말을 이어갔다.

"고민을 해봤는데, 그게 맞겠다는 결론을 내린 거예요. 왜냐하면 이 아이들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순진하고 착한 아이들이에요. 거기다가 10년 이상을 참았죠. 그게 터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순수할수록 저럴 것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선택했어요. 그건 감독의 연출이라기보다 연기자들이 스스로 고민한 결과물이죠. 제 연출이라기보다 아주 자연스러운 발생이었던 거예요."

이렇게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기까지를 그려내며 정 감독은 '소년들'을 만든 한국 사회를 되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힘 있는 자들, 가진 자들이 자기 기득권을 안 놓치려는 게 지나치게 강한 게 아닌가. 그것 때문에 결국 많은 사람이 힘들게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며 "나도 기득권자 중 하나다. 그렇지만 그들이 조금만 열고, 양보하면 이 사회가 참 괜찮은 사회일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 '소년들' 정지영 감독. CJ ENM 제공
 

'행운아' 정지영 감독

 
이처럼 정 감독은 1983년 영화계에 입문한 이래 6·25 전쟁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통찰한 '남부군'(1990)부터 2003년 외환은행 헐값 매각 사건을 다룬 금융범죄 실화극 '블랙머니'(2019)까지 지난 40년 동안 우리 사회의 이면을 면면히 들여다봤다.

많은 부분 실화를 영화적으로 재구성해 스크린에 꾸준히 옮겨 온 감독에게 이러한 작업은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물었다. 정 감독은 "나는 평소에 사람들이 자기 주체를 확고하게 가지고 사는 것이 훨씬 더 삶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거라고 믿는다. 그래서 현재 시공간적으로 어디에 있는가를 항상 확인하고 싶다"며 "그래서 영화의 소재를 그렇게 선택하는 것 같다"고 답했다.

덧붙여 "확인하고 싶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살고 있고, 어디로 가고 있나. 어디서 왔는가. 그걸 확인해서 관객과 대화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정지영 감독이 연출한 실화극 '부러진 화살' '블랙머니' '소년들' 포스터. 각 배급사 제공

올해로 데뷔 40주년을 맞이한 정 감독은 "내가 일부러 그렇게 간 게 아니고 어떻게 하다 보니 사회파 감독처럼 이름도 붙여지게 됐다"며 "내가 현실 참여의식이 있다는 건 분명한 것 같다"고 말했다.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한 긍지를 갖고 살아온 감독이자 작가의 삶이었다.

사회에 보다 더 깊숙하게 발을 디딘 채 영화라는 매체로 정의를 외쳐 온 정 감독은 자신을 '행운아'라고 표현했다.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감독'으로서 현장에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래서 정지영은 행운아다"라고 재차 이야기했다.

40주년이라는 뜻깊은 지점에 서서 또 다른 영화를 꿈꾸는 정 감독에게 과연 언제까지 영화를 하고 싶은지 물었다. 명료한 답변이 돌아왔다.

"관객이 원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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