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 기자의 영화 人 a view] ‘소년들’ 정지영 감독

이원 기자 2023. 11. 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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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공권력 고발…데뷔 40년 식을 줄 모르는 老감독의 열정

- 1999년 삼례나라슈퍼 살인사건
- 누명 쓴 소년들 이야기 재구성
- 정 감독의 세 번째 사건 실화극
- ‘강철중’ 떠올리며 설경구 캐스팅
- 당시 증거 조작 검·경 처벌 없어

- 대작만 투자하면 영화산업 망쳐
- 창작에서 진보적 가치관은 당연

한국 영화계에서 흔치 않은 ‘사회파 감독’이면서도 스스로는 ‘대중영화를 하는 감독’이라고 말하는 정지영 감독이 영화 ‘소년들’로 돌아왔다. 그는 사회적 메시지가 강하지만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대중영화를 지향하며, 대중과의 소통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감독이다.

설경구 유준상 등이 주연을 맡은 ‘소년들’은 1999년 벌어진 삼례나라슈퍼 사건을 재구성한 영화로, 소읍의 슈퍼에서 발생한 강도치사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소년들과 이들의 무죄를 밝히고자 재수사에 나선 형사,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특히 살인자로 낙인찍힌 채 억울한 수감생활을 한 소년들의 모습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사건에 관련된 모든 증거와 자백은 조작된 것으로 드러난다.

‘소년들’은 촬영을 2020년 가을에 마쳤고,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BIFF) 한국영화의 오늘-스페셜 프리미어 부문에 초청돼 베일을 벗었다. 그리고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지난 1일 개봉해 관객들에게서 좋은 평을 받고 있다.

최근 서울 종로 한 카페에서 만난 정 감독은 “진작 개봉했어야 하는데 늦어졌다. 한국 영화가 (흥행이) 잘 안되는 상황에서 지금 개봉하면 손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만든 사람 입장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빨리 심판받고 싶다”며 “계속 미루면 옛날 영화가 된다. 그걸 언제 찍었는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관객은) 느낌으로 안다. 개봉하게 돼서 기쁘다”는 개봉 소감을 밝혔다. 1983년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로 데뷔해 올해 데뷔 40주년을 맞은 정 감독. 그에게서 ‘소년들’과 데뷔 40주년, 현재 한국 영화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세 번째 실화 영화

1999년 삼례나라슈퍼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소년들’을 연출한 정지영 감독. 올해 데뷔 40주년을 맞은 정 감독은 법정 실화극 ‘부러진 화살’, 금융범죄 실화극 ‘블랙머니’에 이어 사건 실화극 ‘소년들’을 연출했다. CJ ENM 제공


정 감독의 17번째 장편영화 ‘소년들’은 2007년의 석궁 테러 사건을 소재로 한 법정 실화극 ‘부러진 화살’(2012), 2003년의 외환은행 헐값 매각 사건을 다룬 금융범죄 실화극 ‘블랙머니’(2019)에 이은 세 번째 사건 실화극이다. 정 감독은 “처음에는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을 먼저 접해 관심을 가졌는데 다른 사람이 하고 있다고 하길래 접었다(이 영화는 김재윤 감독의 ‘재심’이다). 그런데 방송, 신문을 통해 삼례나라슈퍼 사건을 알게 됐고, 할 이야기가 더 많은 것 같아 이게 더 낫겠다 싶었다”고 ‘소년들’을 시작한 계기를 전했다.

이후 정 감독은 삼례나라슈퍼 사건 재심을 맡은 박준영 변호사에게 연락했고, 그가 사건 당사자들에게 영화화의 허락을 받았다. 정 감독은 “당사자분들이 허락은 했지만 혹시 그들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건을 들춰내 상처를 다시 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며 실화를 영화화하는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어 “얼마 전 전주 시사회 때 세 명의 당사자 중 한 친구가 영화를 보고 나서 꽃다발을 주며 ‘감독님 감사합니다’고 하는데 고마우면서도 안도가 되더라”는 에피소드를 전했다.

그리고 “영화 엔딩에도 나오지만 재심이 청구되고 진범도 잡혔지만 거기 연루된 검찰·경찰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지만 적어도 대한민국 공권력이 어떤 윤리로 돌아가는지 정도는 우리 국민이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도 그런 묵인하에 산다는 걸 ‘소년들’을 통해 말하고 싶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소년들’은 증거와 자백이 경찰과 검찰에 의해 조작된 사건을 재수사하는 완주서 수사반장 황준철이 끌고 나간다. 황준철 역을 맡은 설경구는 정의롭게 재수사하는 2000년의 황 반장과 현실의 벽에 좌절해 그 사건을 잊고 지내는 2016년의 황 반장을 연기했다. 정 감독은 “사건을 덮으려는 경찰과 검찰에 세게 부딪히는 인물을 그리려다 보니까 영화 ‘공공의 적’ 강철중 형사가 생각났다. 강철중이 나이를 먹었다면 황 반장 같은 모습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강철중을 연기한 설경구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특히 설경구는 16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을 표현해야 했는데, 체중 감량과 분장을 통해 이를 해냈다. 정 감독은 “설경구는 다른 배우들보다 시간에 따른 변화된 모습을 극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외모를 갖고 있다. 살을 찌우거나 빼는 것을 제안했는데, 설경구가 빼겠다고 하더라”며 “16년간 그 사건의 굴레에 묶여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동정심을 갖게 하기에 감량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보여준 설경구의 노력을 칭찬했다.

‘소년들’은 설경구와 유준상 염혜란 진경 허성태 서인국 등 연기 잘하는 배우가 기꺼이 동참했고, 2020년 코로나19로 힘들었던 시기 4개월간 촬영했다.

▮데뷔 40주년을 맞은 정 감독

지방의 한 슈퍼에서 발생한 강도치사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소년들과 사건의 재수사에 나선 형사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소년들’. 정 감독은 이와 같은 일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영화를 연출했다. CJ ENM 제공


정 감독은 올해 데뷔 40주년을 맞았다. 지난 9월에는 국내에서, 10월에는 런던아시아영화제 기간에 40년 영화 인생을 돌아보는 회고전이 열렸다. 지난해 로테르담영화제에 갔을 때 누군가가 정 감독에게 40주년 회고전에 대해 운을 뗐고, 이를 들은 런던아시아영화제 전혜정 집행위원장이 ‘런던에서 하자’고 제안해 이뤄진 것이다.

정 감독은 “원래 회고전은 은퇴한 사람을 위한 것이고, 회고전을 할 만큼 이룬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거부 반응이 있었다. 그런데 해외에 한국 영화를 알리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어 수락했다”고 말했다. 해외에서 회고전이 열린다는 이야기를 접한 후배 영화인들은 ‘그래도 국내에서 먼저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고, 이를 받아들여 국내에서 먼저 회고전을 열게 됐다.

40년간 한 길을 걸어온 정 감독에게 후배 영화인들은 박수를 보냈다. 정 감독은 자신의 영화 17편 중 세 편을 꼽으며 말했다. “누군가가 그 말을 했는데, 잊히지 않는다. ‘한국 현대사 3부작’이라며 ‘남부군’(1990)은 한국 현대 정치사, ‘하얀 전쟁’(1992)은 한국 현대 경제사, ‘헐리우드 키드 생애’(1994)는 한국 현대 문화사를 그리고 있다고 하더라. 내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럴듯한 진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부러진 화살’은 2010년대 들어 재기할 수 있게 해준 작품으로 중요했다”고 덧붙였다.

정 감독은 한국 영화계를 위해 많은 일을 해왔다. 1980년대 미국 영화 직배 반대, 1990년대와 2000년대 스크린쿼터 사수 운동 등에 앞장서며 한국 영화를 지키기 위해 헌신했으며, 영화계 어른으로서 한국 영화 현안에 대해서 조언하면서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고 있다. 그는 “1980년대 미국 영화 직배 반대할 때 관객들이 ‘너네들이 영화를 잘 만들면 우리가 미쳤다고 한국 영화 안 보겠느냐’는 소릴 들었다. 참 비참했다”며 “그런 비참한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한국 영화를 해외에서 다 부러워한다. 그런데 이것을 잘 유지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고 현재 극심한 불황을 맞으며 위기에 놓인 한국 영화계를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산업적 문제에 있다. 대기업들이 대작 위주 영화를 중요시하고, 작은 영화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관객이 원하는 대작은 정해진 매뉴얼이 있어 시간이 지나면 식상해지고 멀어지게 된다”고 진단하며 “대기업들이 다양한 영화에 투자해서 다양한 영화가 공존하는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한국 영화가 저절로 발전할 토대가 만들어진다”는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정 감독은 현재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공동조직위원장이기도 한데, 영화진흥위원회의 2024년 영화제 지원 예산 50% 삭감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어느 정부나 영화계 사람들이 좀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니 우리 편이 아니라는 식의 편가름을 한다. 문화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정치적인 것을 떠나 생각이 진보적일 수밖에 없다. 새로운 것을 창작해야 하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그 작업이 보수적일 수가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차기작으로 제주 4·3 사건과 김구 선생 암살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는 정 감독. 76세이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사회파 감독이자 영화 현장에서는 항상 ‘청년’으로 열정을 다하는 그가 오래도록 관객과 함께 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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