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처럼 활판 인쇄… 중편 선집 600만쪽 찍어냈죠”
‘간접인쇄’ 오프셋 방식과 달라
“장인의 숨결 제대로 느껴진다”
77만원 정가에도 독자들 환호
6일 경기 파주시 출판도시활판공방. 인쇄공 김평진 장인(74)이 제작된 지 100년이 넘은 활판인쇄기에 활판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기계 안으로 빨려 들어간 활판 위 글자에 잉크가 묻었다. ‘칙칙’ 하는 소리와 함께 흰 종이 위에 검은 글자가 인쇄됐다. 김 장인은 결과물을 내밀며 웃었다. “뭐가 다른지 한번 느껴보세요.”
인쇄된 종이는 검은 글자의 농도가 진해 눈에 잘 들어왔다. 표면을 만져보니 글자마다 오톨도톨한 요철(凹凸)의 질감이 느껴졌다. 감회가 새로워 인쇄된 미국 작가 잭 런던(1876∼1916)의 중편소설 ‘야성의 부름’의 한 구절을 음미하며 읽었다. “두꺼운 목으로 늑대 무리의 노래이자 이전 세상의 노래인 야성의 부름을 울부짖는다.”
전자책과 웹소설이 인기를 끄는 요즘 종이책의 본류를 찾아간 기획을 내놓은 건 박성식 다빈치 대표(58)다. 박 대표는 쇠락해가는 문학 장르(중편소설)와 인쇄 기술(활판인쇄)을 되살리고 싶어 약 10년 전부터 선집을 기획했고, 2년 전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박 대표는 “팔만대장경판으로 책을 만드는 것과 유사하다”며 “더 빠르게, 더 저렴한 가격으로 책을 만드는 것이 발전인지 묻고 싶었다”고 했다.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먼저 기계로 글자를 활판에 새겨야 했다. 파주활판공방에 남아 있는 100년 이상 된 활판인쇄기 두 대는 고장이 잦았다. 김 장인과 권용국 장인(89)의 나이가 적지 않은 점도 근심거리였다. 알라딘에서 제작비 5억 원을 투자했고, 박 대표가 사비 5000만 원을 더 썼다.
내용도 신경 썼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1903∼1950)의 ‘동물농장’,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1913∼1960)의 ‘이방인’처럼 한국 독자에게 익숙한 작품뿐 아니라 미국 페미니스트 작가 케이트 쇼펜(1850∼1904)의 ‘각성’, 미국 호러 작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1890∼1937)의 ‘인스머스의 그림자’ 등 다양한 작품을 담았다. 프랑스 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의 ‘공놀이하는 고양이 상점’처럼 국내 초역한 작품도 있다.
이 선집은 7일까지 132세트가 팔렸다. 구매자의 85.2%가 40대 이상이다. “장인의 숨결이 느껴진다”, “종이에 꾹꾹 눌러 담긴 문장”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정가 77만 원에 이르는 선집에 왜 지갑을 연 걸까. 박한수 파주활판공방 대표(57)는 “활판인쇄로 찍어낸 책엔 ‘아날로그의 맛’이 살아 있다.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가 있어도 LP판을 찾듯 마니아 독자들은 소장하고 싶은 책을 찾는다. 오프셋으로 찍은 글자는 쉽게 뭉개지고 날아가지만, 활판인쇄로 종이에 글자를 꾹꾹 눌러 새긴 책은 500년 이상 가서 소장가치가 높다”고 했다.
판매가 끝나면 제작에 쓴 활판은 모두 해체해 구매자에게 사은품으로 증정할 예정이다. 인쇄된 1000세트는 다시는 출간되지 않는 한정판으로 남게 되는 셈이다. 비슷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제작자들은 ‘고난의 행군’을 다시 할까. 박 대표는 “다 쏟아부었다. 이번 프로젝트를 마지막으로 출판계에서 은퇴할 계획”이라고 했다. 김 장인은 “누구라도 불러준다면 다시 인쇄기를 돌릴 것”이라고 했다.
파주=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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