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로 그릇농사 짓는 집'을 완성하기까지

2023. 11. 8.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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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하다] 도예가로 홀로서기

[신금호 전 서울지방노동위원장]
'불로 짓는 농사' 염농(焰農). 정확하게는 불로 짓는 '그릇 농사'라는 의미다. 현장 활동가로, 노동잡지 편집장으로, 서울·경기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노동의 세계에 근 30년을 몸담았던 신금호 선생이 은퇴 후 도예가의 길을 걸으며 사용하는 아호다.

1944년 생인 신 선생은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 엘리트의 영예를 좇지 않고 '조국 근대화'가 빚어낸 불의에 몸과 머리로 맞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길로 향했다.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그릇빚음'을 잠시 멈춘 시간에 골프장 미화원으로 일하는 노동자다.

최근 주변의 권유로, 손자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서전에 꾹꾹 눌러 담았다. 젊은날 정면으로 마주했던 군사정권 시대상, 사회에 나와 겪었던 척박한 노동 현장의 기억을 농사짓듯 기록했다. 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한 어느 '백발 노동자'가 견뎌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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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를 배운 지 백일이 되어가던 10월 어느 날. 이제는 온갖 것을 하나하나 가르쳐 줄 때도 되었겠지 하며 기대했지만, 승훈이는 "형님, 나는 안거(安居)에 들어가야 하니 이젠 형님 집으로 가세요"라며 나를 작업장에서 밀어냈다.

나는 뭐라 항거할 수 없었다. 그러려니 하며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무너지는 속마음을 겉으로 내비치지 않았다. 언젠가 마주하게 될 초짜 도예가(陶藝家)로서의 정상적인 운명이라고 여겼다.

승훈이는 작업장 주인이요 나의 스승 아닌가. 지금껏 승훈이는 자기 작업자리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자리를 나에게 내어주지 않았던가. 자기의 작업모습을 숨기지 않고 있는 대로 보여주지 않았던가. 마음을 비워내니 비워낸 만큼 가볍고 고요해졌다. 달리 선택할 여지도 없었다.

그동안 내가 쓰던 손물레와 백자 흙덩이 두 개를 가지고 집으로 왔다. 아내인 김 화백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계속하란다. 그 나직한 한마디가 나에게는 하늘의 계시요 운명의 방향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김 화백 화실 한 귀퉁이에 작은 작업대를 마련해 놓고 도자예술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 시작이다!' 마음을 다잡아도 나는 작업대 앞에 앉아 있는 눈 뜬 장님이었다. 독학으로 눈을 떠보기로 했다. 정보를 수집할 만한 책방은 다 돌아다녔다. 서울 교보문고나 양지문고는 기본이었다. 남산으로 옮겨간 국립도서관에도 다시 가봤다. '도(陶)'자란 이름이 붙어 있는 책은 영어사전이든 일본어 사전이든 가리지 않고 몇 번이고 들추어 보았다. 단행본은 몽땅 샀다. 안성 시립 중앙도서관에 아예 눌러앉아 '도(陶)'자 붙은 글과 지냈다. 나로서는 미지(未知)의 길이요 탐험과 탐색의 길이었다. 홀로 걷는 초보 도자 예술가로서의 길!

그릇빚기는 도자예술의 첫걸음이었다. 현실이 너무나도 각박했고, 홀로 더듬어 나아가려니 너무나 더뎠지만 목표는 분명하고 뚜렷했다. 그릇빚기의 실패와 시행착오야말로 선생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곧 선생이었다. 내 작업장에서 흙을 느끼고, 오랜 시간 흙을 주물러 흙과 마음을 하나로 하고, 부드러워진 흙으로 키 낮은 그릇을 빚어내고, 그릇 벽이 낮아 보이면 타래를 만들어 붙여 올리고, 그릇 높이가 일정하도록 고르게 자르고, 자른 자국을 눌러가며 부드럽게 만들고, 빚어낸 그릇을 그늘에 말리고….

모양이 엉성해도 만들기를 멈추지 않았었다. 그만큼 기술도 조금씩 늘어갔다. 만든 그릇들의 모양과 두께, 크기가 마음에 차지 않아도 그릇들은 내가 낳은 옥동자들이었다. 사랑스럽고 대견한 나의 옥동자!

불가마를 놓을 작업장도 따로 만들어야 했다. 화실 끝과 연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마른 땅 잡초를 뽑아내고, 흙바닥을 고르게 편 후 사각의 경계선을 만들어 시멘트와 콘크리트를 붓고 편편히 골라 말렸다. 도자스승 승훈이 도움으로 여주에서 도염식 중고 가스 불가마를 마련해 시멘트 바닥에 올려놓았다. 우리 형편에 비싼 가격이었지만, 김 화백이 가뿐히 돈을 지불하기로 했다.

가마는 0.5루베(입방미터)짜리. 두꺼운 철판과 내화벽들로 제조된 가마는 덩치가 크고 육중했다. 굴뚝이 높았다. 겉에는 온도 측정기와 압력계기 등 필요한 기기가 모두가 부착돼 있었다. 가스 투입구멍은 한편에 4개이니 반대편까지 모두 8개, 공기구멍은 철판 옆구리에 12개. 모든 시설과 계기가 틀림없어 보였다.

가마 철문을 여니 밑면에 깔린 바닥판 말고는 다섯 면이 희고 밝았다. 정육면체 모양의 내부가 내화벽돌을 가지런히 붙여 세워 밝고 환해보였다. 가스 불길이 아래에서 솟아올라 전체를 휘돌다가 다시 바닥에 난 구멍으로 빠져나가 연통으로 연결되는 도염식 가마였다. 가마의 다리 높이는 7~80cm 가량이었고, 상상 이상으로 굴뚝이 좁고 높았다. 여주의 청년 사장은 곧장 불을 붙여도 좋다고 호쾌하게 장담하였다.

작업대도 설치하고 그릇 건조대 두 개를 들여놓으니 작업장이 빡빡했다. 이것들 모두 도자예술 초년병 홀로 땀과 정성을 들여 만들어낸 공방 모습이었다. 공방 명칭은 문리대 동문 이세윤이 새겨준 간판대로 '염농재(焰農齋)'라 하였다. '불로 그릇농사를 짓는 집'. 마음에 쏙 드는 이름이었다.

▲신금호 선생이 빚은 도예 작품들 ⓒ신금호

<계속>

[신금호 전 서울지방노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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