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의 주인이 된다는 것[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2023. 11. 7.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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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내가 하는 생각이 진정 내 생각인지 확신하시나요? 아무 생각 없이 남의 생각을 받아들여 내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살면서 나를 성찰한다면 남의 생각을 내 것으로 품고 있다고 깨닫게 될지 모릅니다. 자기 성찰 능력을 지닌 사람이 늘어날수록 세상이 평안해지겠지만, 돌아가는 형세는 그렇지 않습니다. 정신분석학에 혁신적인 관점을 꾸준히 추가한 분석가로 영국의 윌프레드 비온이 있는데, 그 이론에 제 생각을 더해서 세상 이야기를 풀어 보려 합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숙성되지 않은 생각을 연속해서 쏟아내는 사람이 많을수록 세상이 혼탁해집니다. 스스로를 지키고 이롭게 하려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는 존중하나, 성숙한 사회는 숙성된 생각들이 모여야 이루어집니다. 원초적인 욕망을 걸러지지 않은 거친 언어로 표현해서 공격적 본능을 일시적으로 충족시킬 수는 있겠으나 듣는 사람들의 평정심을 흔들어 댄다면 폭력입니다. 욕망의 분출을 스스로 통제하지 않는 사람과는 어울려 살기 힘듭니다. 언어의 탈을 쓰고 분출된 욕망은 폭탄처럼 터져서 해를 끼칩니다.

분석가 비온은 솟구쳐서 뿜어져 나오는 아기의 욕망을 엄마가 자기의 마음에 잘 받아들여 소화시켜서 돌려줘야 아기의 마음이 건강하게 자란다고 했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엄마들이 들으면 크게 놀랄 일이지만 이유식이 마땅찮던 시절의 아기들은 할머니가 입안에서 직접 씹어서 부드럽게 반쯤 소화시킨 음식을 받아먹고 자랐습니다.

개인이 아닌, 사람들이 모여 만든 집단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들려오면 누구의 어떤 생각인지를 판단하기가 혼란스럽습니다. 집단에서 나타나는 심리 현상은 훨씬 더 역동적입니다. 개인이라면 발휘할 자제력을 집단에서는 쉽게 잃을 수 있어서 집단의 말과 행동은 럭비공같이 어디로 튈지, 예측이 어렵습니다. 소속된 개인이 마음을 놓고 있으면 집단이 주입한 생각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해 믿어 버리는 늪에 빠집니다. 자신이 군인으로 싸운 경험과 전쟁에서 상처받은 집단들의 마음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깨달은 비온의 이론을 빌리면 어떤 합리적인, 과제 지향의 집단도 시간이 지나면서 무의식의 영향을 받아 자신들도 모르게 일보다는 왜곡된 욕망과 사람 간의 관계에 집중하는 집단으로 변질됩니다.

집단의 변질은 세 가지 방식으로 서서히 은밀하게 진행됩니다. 우선, 지도자에게 어린아이처럼, 지나치게 의존하게 됩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기보다는 기대어서 성장하고 보호받으며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어떤 경우는 세상을 바꾸고 자신들을 구원해 줄 지도자가 안에서 나타나기를 갈망하고 추앙하는 방향으로 집단이 움직입니다. 또 다른 경우는 외부에 공격할 적을 내세우고, 공격과 후퇴를 말과 행동으로 반복하면서, 거칠게 흔듭니다.

원래는 해야 할 일을 합리적으로 하려고 의도했던 집단도 구성원들의 무의식적 욕망이 침투하면 변질됩니다. 집단적 마음 상태를 공유해서 확신으로 포장하면 힘 있게 분출되면서 파괴력을 과시합니다. 세 가지 마음 상태를 집단이 오가면서 움직이지만 경험에서 배우지는 못합니다. ‘확신’은 집단 구성원들 사이에 공유될수록 굳어지지만,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 믿음이 무너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상을 다 바꿔줄 것으로 믿고 의지해 온 지도자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도 눈을 감습니다. 여전히 그 사람이 집단 내의 갈등을 처리하고 집단이 해체되는 위기를 막으리라고 믿습니다. 지도자가 후퇴하는 모습을 보여서 자신이 결국 그 사람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들어도 고개를 저으며 회피합니다.

변질된 집단은 가치관이 이미 왜곡되어 있어서 위기가 닥쳐도 지도자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의존과 추앙의 대상으로 유지합니다. 오히려 악마화할 바깥 상대를 만들어서 공격의 에너지를 외부로 돌립니다. 자발적인 선택들로 보이나 무의식에 휘둘리는 겁니다. 집단의 흐름에 사로잡히면 현실 판단이 작동을 멈추어서 깨닫지 못합니다.

살아 있는 누구도 생각을 멈추지 않습니다. 생각의 틀을 내 생각으로 채우는지, 아니면 남의 생각을 그냥 주워 담고 있는지는 전혀 다릅니다. 숙성된 내 생각으로 채우면 의견이 되고, 성급하게 남의 생각으로 채우면 선입견이나 편견일 확률이 높습니다.

생각을 성급하게 말이나 행동으로 옮기면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롭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생각을 숙성시키는 기능을 마음에 만들어서 유지 관리해야 합니다. 생각의 출발점은 익지 않은 열매와 같아서 숙성시키려면 천천히 필요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말로 표현되는 폭력은 숙성되지 않은 생각의 부작용입니다. 애초에 배설이 목적이고, 소통이 아닙니다. 참된 지도자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거친 생각을 받아들여 성숙한 생각으로 되돌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윌프레드 비온은 어린 나이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탱크를 몰며 싸웠습니다. 전쟁 이후에는 남의 생각을 명령으로 받아 수행해야 하는 집단을 떠나 내 생각, 혼자의 힘으로 정신적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졌습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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