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 바뀌려면…독일의 아데나워 같은 지도자 일본서 나와야”[논설위원의 단도직입]
일본 쓰쿠바대학 도쿄캠퍼스에서 국제 비즈니스 MBA프로그램의 국제 정치경제학 교수로 일했고, 퇴직 후에는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현대 일본에 관해 저술한 책으로 여러 상을 받았고, ‘뉴리퍼블릭’ ‘내셔널인터레스트’ ‘뉴레프트리뷰’ 등에 기고하고 있다. 교수가 되기 전에는 투자은행가로 활동했고, 부르킹스연구소 객원연구원을 지내기도 했다. ‘아시아태평양저널: 일본포커스’의 코디네이터이기도 하다.
독일과 프랑스의 갈등, 독일의 철저한 양보로 이룬 화해 한·일에 본보기
미·중에 갇힌 한·일, 정치적 정통성 가진 지도자가 나와 잘 헤쳐나가야
일본 지도자, 미·일 동맹 구조개혁과 영토분쟁 해결·과거반성 교육해야
민주당의 오자와 몰락 아쉽지만 그가 추진한 ‘아시아로의 회귀’는 유효
일본의 ‘정치적 무책임 구조’, 결국엔 태평양전쟁과 원전사고로 이어져
등장인물 설명
마루야마 마사오(1914~1996) = 일본의 정치학자로 전후 민주주의의 사상적 구심 역할을 했다. 1946년 5월 일본의 군국주의를 비판한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가 유명하다. 그는 일본의 2차 세계대전 전범들이 ‘원치 않는 재난에 마지못해 끌려들어간 피해자’처럼 행동했다고 비판했다.
오자와 이치로(1942~) = 1990년대 일본 정치개혁의 중심인물이다. 2003년부터 민주당에서 핵심 역할을 하면서 2009년 민주당 집권의 주역이 됐다. 오자와는 1993년에 쓴 <일본개조계획>을 통해 보통국가화를 주창했다. 미·일관계를 대등한 관계로 재조정하고,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등 외교안보 정책의 대전환을 꾀하려다 미국과 마찰을 빚었다.
다나카 가쿠에이(1918~1993) = 일본 정치권에선 드물게 자수성가한 ‘흙수저’ 출신 정치인으로 1972~1974년 일본 총리를 지냈다. ‘일본열도개조론’을 내걸고 대대적 토목사업을 펼쳤으며, 1972년 미국을 앞질러 중국과 수교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미국 방위산업체인 록히드로부터 뇌물을 받은 ‘록히드 스캔들’로 실각했으나 이후에도 상당기간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2021년 국내에 번역 출간된 미국 학자 태가트 머피(71)의 <일본의 굴레>(원제 : Japan and the Shackles of the past)는 일본의 정치와 경제를 역사·문화적 맥락에서 분석한 책이다. 600페이지 넘는 ‘벽돌책’인데도 15쇄를 찍으며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금융인과 대학 교수로 40년간 거주하며 일본의 내부 작동원리를 체득한 저자의 통찰력이 돋보였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일본의 아웃사이더이면서 인사이더인 저자의 ‘겹눈’에 비친 일본의 단면은, 일본인들은 물론 한국인들의 그것과 꽤 다르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태가트 머피 전 쓰쿠바대 교수를 지난달 24일 경향신문에서 만나 일본 정치, 미·일관계 그리고 한·일관계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그는 한·일관계가 바뀌려면 영토문제를 철저히 양보함으로써 프랑스와의 화해를 이룬 독일의 아데나워 같은 지도자가 일본에서 나와야 한다고 했고, 일본이 미·일동맹에 기대지 말고 외교와 안보를 스스로 책임질 필요가 있다고 했다. 책을 우리말로 옮긴 박경환·윤영수 번역가가 통역을 맡았고, 추천사를 쓴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도 자리를 함께했다.
- 책에서 일본이 실수를 인정하는 능력이 결여됐거나 변화를 꺼리는 태도를 ‘제도의 신성성’으로 분석한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도쿠가와 막부도 그랬지만,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무사세력들은 천황제를 망토로 삼아 정통성을 유지했습니다. 그렇게 막후에서 권력을 행사하던 유신의 원로들이 사라진 뒤 권력의 진공상태가 발생합니다. 1920~1930년대에 암살과 권력 투쟁이 통제력을 잃고 전개됐고, 태평양전쟁 때까지 ‘통제력 부재’ 상태가 이어집니다. 전후 일본인들은 권력의 정통성을 표면적으로는 입헌민주주의에서 찾지만 실제론 여전히 천황을 정통성으로 여기는 듯 합니다.”
도쿠카와 막부는 그들이 만든 제도를 천황의 권위를 빌려 신성화했고, ‘제도적 신성성’이 근대화 이후에도 지속됐다고 머피 교수는 분석했다. 일본이 기성 시스템에 대한 집착이 강한 이유도 ‘제도의 신성성’ 탓이라는 것이다. 표면적 권위와 실제 권력이 별개로 존재하는 일본 권력구조의 특징은 ‘정치적 무책임’이라는 부작용으로 이어진다고 머피 교수는 본다.
- 전후 일본의 권력은 누가 쥐고 있었던 것입니까.
“전후의 실제 권력은 1945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는 관료들이 쥐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중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 분산돼 있었습니다. 미국이 외교와 안보를 책임졌기 때문에 경제 등 나머지 분야에서 관료들이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정치인들이 관료들로부터 권력을 되찾으려고 시도하지만 성공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 저자가 책에서 제시한 일본의 가장 큰 굴레는 ‘정치적 무책임 구조’로 보입니다. 관료나 정치인들이 총리 뒤에서 권력을 행사하되 책임은 지지 않는 구조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네덜란드 저널리스트 카럴 판볼페런이 쓴 <일본 권력의 수수께끼>(1990년 일본어 출간)에서 일본에 정치적 책임의 중추가 없다고 비판합니다.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를 분석해 내린 결론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대부분의 국가는 정책을 설명할 주체가 있게 마련인데 일본에서는 ‘왜 이걸 하고 있는지 설명해보라’는 질문에 정부가 자신있게 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판볼페런의 지적입니다. 사실상의 독재체제인 싱가포르도 지도자 리콴유가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답변도 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일본에서는 답변을 할 주체가 없습니다.”
그는 책에서 집권 자민당에 대해 ‘일본이라는 국가의 지배구조 전반에서 다양한 권력을 가진 모든 층위의 사람들에게 정치적 보호막을 제공하는 것’이 역할이었다고 평가했다. 지배 엘리트층의 서로 다른 구성원들 사이에서 ‘완충 작용과 중재역할’을 하는 것이 전부였을 뿐 일본의 정책방향을 바꿀 능력은 없었다는 것이다. 머피 교수는 1970년대 들어 일본의 경제모델을 수정할 필요성이 커졌으나 정통성 있는 정치적 리더십 부재로 그런 작업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 ‘정치적 무책임’ 구조가 세계에 대한 메이와쿠(민폐)로 나타난 것이 태평양전쟁,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아니었을까요.
“일본의 원전정책의 가장 큰 문제는 원자력발전소의 위험성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마치 (거품경제 붕괴 이전) 일본 은행들이 고객에게 대출을 줄 때 회수하지 못할 리스크를 소홀히 여기던 것과 비슷합니다. 바닷가에 원전을 짓는다면 당연히 쓰나미 피해에 대한 고려를 했어야 합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리스크 관리의식의 부재가 빚은 것이지만, 정치적 무책임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머피 교수는 일본에서 2009년 정권교체를 이룬 민주당이 3년여만에 물러난 것과 민주당 핵심인 오자와 이치로 전 간사장의 정치적 몰락을 아쉬워했다. 민주당 정권은 ‘동아시아공동체론’을 내걸고 ‘아시아로의 회귀’를 추진했고, 미국 편중에서 벗어나 중국·한국과의 협력에 적극적이었다. 오자와는 일본의 안보체제를 미국 중심에서 ‘유엔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거대한 전환을 꿈꿨다. 그러나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성급한 이전 방침으로 미국과 마찰을 빚은 것이 ‘단명’의 원인이 됐다. 일본 언론과 검찰이 오자와를 악덕 정치인으로 몰아갔지만 머피 교수는 오자와야말로 일본을 바꿀 수 있었던 정치인이라고 평가했다.
- 일본의 정치인 중에서 오자와 이치로를 높게 평가한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오자와는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이해가 남달랐습니다. 일본 정치인들은 대체로 정치인 집안의 귀공자들이라 소매를 걷어붙여야 할 문제에 소극적이었던 반면 오자와는 이를 마다하지 않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결국 실패했지만 오자와는 일본이 필요로 했던 근본적인 개혁을 추진할 정치인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오자와는 정치적 스승인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를 닮아 정치적 수완은 대단했지만 그의 인간적 매력은 닮지 못했습니다. 일본 독자들이 이 책의 내용 중 가장 부정적으로 반응했던 대목이 오자와에 관한 평가였습니다. 그만큼 논쟁적인 인물이었던 셈이죠.”
- 민주당 정권이 미국의 눈 밖에 난 것이 단명의 원인 중 하나로 볼 수 있겠네요. 그런 점에서 미·일동맹이 일본의 또 하나의 굴레가 아닐까요.
“미·일 동맹이 굴레라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민주당 정권의 시도는 반세기 동안 유지됐던 질서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습니다. 미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시스템 전체를 흔드는 일이라 막후 세력들의 반발이 컸습니다. 대외적으로도 중국에서 시진핑 정권이 등장하고, 북한이 핵위협을 강화하던 시기였던 것도 (민주당의 실패의) 원인이 됐다고 봅니다. 민주당의 몰락은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소비세 인상을 강행했던 것, 중국과의 센카쿠 영유권 갈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이 원인으로 보입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당시엔 비판이 많았지만 저는 간 나오토 총리가 사고 대처를 잘했다고 평가합니다. ”
-아베 신조 총리가 2006년 첫 총리 때는 1년 만에 물러났지만, 6년 뒤 재집권해서는 성공한 듯 보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아베 총리는 근본적으로 바뀐 게 없었지만, 6년의 공백기 동안 자신을 개혁가로 포장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 같습니다. 중국과의 센카쿠 영유권 갈등에 무력했던 민주당과 달리 대중강경 태도를 보였고, 경제적으로도 재정지출과 양적완화로 인기가 회복됩니다. 아베는 2013년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한 뒤 본격적인 우익 어젠다를 내놓기 시작합니다. 이 책을 마무리하던 시점(2014년)에는 우려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급진적인 우경화는 일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평가합니다.”
머피 교수는 지난해 8월 ‘뉴레프트 리뷰’ 기고에서 일본을 권위주의적인 민족주의 국가로 바꾸려던 아베 총리의 시도가 성공하지 못한 것은 관료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고, 일본 국민들의 생각과도 너무나 동떨어진 이슈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아베가 아베노믹스로 경기부양을 꾀했으나 일본 재무성의 소비세 인상 움직임을 막지 못했고, 군사적 모험에 휩쓸리거나 자녀들이 군국주의에 물드는 것을 일본 대중들이 원치 않았다는 것이다.
- 아베 시대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아베 총리가 남긴 유산은 두 가지인데 첫째, 전후 정치질서를 재건해 총리의 권한을 강화한 점입니다.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가 세운 ‘1955년 체제’를 재건한 것이죠. 두 번째는 미국과 더욱 밀착된 관계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미국이 언젠가 아시아에서 물러날 때를 대비한 백업 플랜으로 베트남이나 호주, 인도와 관계를 강화했던 점도 꼽을 수 있습니다. 한가지를 더 들자면 민주당의 도전을 봉쇄했다는 점입니다.” 자민당 장기집권 체제의 기원인 ‘1955년 체제’는 좌파가 선거를 통해 집권할 가능성을 원천 봉쇄한 것이 핵심이라고 머피 교수는 설명한다. 아베 정권 이후 민주당이 무력화된 것도 ‘55년 체제 재건’의 일환인 셈이다.
- 이 책에서 일본이 아시아로 회귀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역사의 추가 동아시아로 기울고 있으니 일본도 그 흐름에 올라타야 한다는 취지였는데, 그 이후 미·중 경쟁 등의 국제질서 전개를 보면 딱히 그렇게 보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일본은 지리적인 위치를 바꿀 수 없는 만큼 ‘아시아 회귀’에 대한 강조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런 노력을 지속해야 하고, 중국과도 좋은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지금 미국이 대중 정책을 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본과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미국과 중국 사이에 갇혀 있기 때문에 방향설정을 잘 해야 하는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잘 헤쳐나가려면 두 나라 모두 정치적인 정통성을 인정받은 정부가 주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머피 교수는 일본 지도자가 이뤄야 할 과제를 6가지로 제시했다. 첫째, 안보문제를 스스로 책임질 것 둘째, 미·일동맹의 구조개혁, 셋째, 주변국과의 영토분쟁 해결, 네째, 과거 반성과 성찰의 학교교육 등이다. 한국과 관련이 큰 내용들이다. 나머지 두가지는 사회 안전망 확충, 여성정책의 변화이다.
- 바람직한 한·일 관계를 위해 일본의 지도자들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예를 들어 과거사 문제에 대해 한국인들의 감정을 충분히 고려하는 지도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한·일 관계를 진정으로 복원할 만한 긴 안목을 가진 정치가들이 일본에 드문 것이 현실입니다. 한국과 일본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방이 될 조건을 갖췄지만, 역사 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이를 제대로 성찰하는 지도자가 일본에 없었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그렇게 된 데는 패전후 일본이 과오를 성찰할 기회를 막은 미국도 책임이 큽니다. 프랑스와의 화해를 이끈 독일의 아데나워 총리 같은 지도자가 일본에서 나와야 합니다.” 1949~1963년 서독 총리를 지낸 콘라드 아데나워는 알자스로렌과 구 프로이센 지역을 프랑스와 폴란드에 양보함으로써 유럽 평화와 통합의 기틀을 닦았다.
- 바람직한 미·일관계는 어떠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미국의 군사력이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거대하게 주둔하고 있는 상황 하의 미·일 관계는 진정한 파트너라고 볼 수 없습니다. 기울어진 관계가 회복되려면 일본이 외교·안보에서 주체적인 결정권을 가질 수 있어야 하지만 미국이 그렇게 되도록 협조할 가능성은 크지 않습니다.”
서의동 논설실장 phil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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