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신호등 필요해요” 학생이 직접 만드는 안전 통학로
- 서울 성동구 2018년 시작 리빙랩
- 학부모·학교·주민 등 의견 내고
- 기관 간 협업으로 위험요소 해결
- 실제 통학로 반영 메타버스 게임
- 학생이 문제 찾고 개선방안 고민
- 지도사와 등하교 ‘워킹 스쿨버스’
- 사고 ‘뚝’ 타 지자체 우수 사례로
- 부산시, 내년 리빙랩 사업 추진
- 영도선 참사 후 주민 머리 맞대
- 지역 여건 맞춘 안전 해법 기대
“밖에는 차가 오니까 인도로만 가야 해.”
이현정 서울 성동구 교통안전지도사가 저학년 학생들을 인솔하며 이같이 말했다. 지난달 27일 오전 8시, 국제신문 취재진은 성동구 행당초등학교 워킹 스쿨버스 등굣길을 동행했다. 아이들은 두 줄씩 일렬로 지도사를 따라가며 차근차근 학교로 향했다. 이 지도사는 아이들의 ‘까르르’ 웃음소리 사이 틈틈이 “계단에서는 앞을 잘 봐야 해”, “좌우 살피고 횡단보도 안으로 가자”고 지도했다.
성동구는 교통안전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어 타 지자체로부터 우수사례로 꼽히고 있다. 보행자 교통사고 사상자가 2014년 334명이었던 반면 지난해에는 216명으로 35% 감소했다. 취재진이 성동구 현장을 방문한 이유다.
워킹 스쿨버스는 지도사가 어린이를 데리고 등하교하는 집단 보행 시스템이다. 성동구는 2014년 전국 최초로 워킹 스쿨버스를 도입해 현재 38개 노선을 운영하고 있다. 관내 초등학교 저학년 (1~3학년)학생 가운데 5명 중 1명이 이용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방학 기간에도 운영한다. 이 지도사는 “아이들을 등하교시키는 역할도 있지만 고학년 학생이 돼 혼자서도 안전하게 다니도록 교통 안전 수칙 등을 함께 지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원준 성동구 교통행정과 주무관은 “지도사가 학부모에게 수시로 등하교 상황에 대해 알리고 학교마다 수요조사를 통해 노선을 여러 개 운영하는 만큼 학생과 학부모 만족도가 98%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민·관 현장서 답 찾아
구에서는 이와 같은 정책의 기초가 되는 건 2018년부터 진행한 안전통학로 리빙랩(생활 실험실)이라고 입을 모았다. 관에서 하향식으로 정책을 추진하는 일반적인 방법과는 다르게 리빙랩은 현장에서 문제를 발굴하고 해결책을 찾는 상향식 정책 결정 과정이다. 이는 보다 민주적인 방식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같은 날 오후 2시, 경동초 저학년 학생들이 속속 하교했다. 교문을 나와 학교 오른쪽 도로로 가는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190m가량 이면도로였던 이 도로는 구에서 2018년부터 2021년까지 서울시교육청 등과 협의한 끝에 학교 부지 일부를 활용해 보행 공간 확보를 이뤄냈다. 기존 학교 담장을 허물고 일부 공간으로 보행로를 만든 것이다. 차도에서 무방비 상태로 아이들이 등하교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보·차도가 분리돼 있어 사고 우려가 줄어들었다.
리빙랩으로 학부모와 학생, 학교로부터 이 문제에 관한 의견을 받았고 기관 간 협업으로 만든 성과다. 설태연 구 교통행정과 주무관은 “문제 해결을 위해 유관기관끼리 40차례가량 면담했다”며 “계속해서 협의한 끝에 결론을 내린 것”이라고 밝혔다.
2018년부터 시작된 성동구 안전통학로 리빙랩은 학교별 학부모, 교사, 주민 등이 참여해 직접 등하굣길을 다녀보며 의제를 발굴하고 워크숍에서 개선 아이디어를 나눴다. 지난해에는 응봉초 4·5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메타버스 게임인 로블록스를 활용해 리빙랩을 정규 교과 과정 때 진행했다. 실제 통학로를 반영한 게임을 하면서 학생들이 문제를 깨닫게 하고 흥미를 유도했다. 장달덕 구 스마트도시과 팀장은 “앞선 사업에서는 어른의 시선으로 통학로 개선에 나섰다면 이제는 아이들 시선으로 리빙랩을 진행하자는 취지”라면서 “수업에서 지역 문제 해결을 위한 리빙랩 사례를 소개하고 학생이 찾아낸 위험 요소 해결 방법에 관해 토론하는 시간을 보냈다”고 설명했다. 취재진이 직접 게임을 해보니 무단횡단을 하면 게임이 끝나는 등 학생이 교통 안전 수칙도 익히게끔 구성돼 있다.
리빙랩을 하면서 학생들은 ‘학교 앞에 신호등이 있으면 좋겠다’, ‘학교 지킴이 선생님이 여기 계셨으면 좋겠다’ 등 여러 의견을 냈다. 장 팀장은 “학생들이 통학로를 다니면서 느꼈던 위험한 점을 솔직하게 제시했다”며 “관련 부서로 의견을 이관했고 현재는 문제가 다 해결된 상태”라고 밝혔다.
▮부산형 안전 해법 절실
부산에서도 통학로 안전 개선을 위해 리빙랩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영도구 청동초 황예서 양이 지난 4월 어린이보호구역에서 목숨을 잃은 뒤 청학언덕길 마을교육공동체는 리빙랩 형태로 안전한 등하굣길 조성에 나서고 있다. 이 사업은 시민이 지역 문제를 발굴하면 공공기관이 함께 해결 방법을 찾는 부산지역문제해결플랫폼의 의제로 선정돼 9월부터 진행되고 있다. 배우리 공동체 대표는 “참사 이후 통학로 위험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하다고 느꼈다”며 “아이들로부터 어른이 생각지도 못했던 등하굣길의 위험요소를 듣고 통학로를 개선하기 위해 주민 토론회를 여는 등 의논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산시와 시교육청은 어린이통학로 종합안전대책의 일환으로 내년에 초등학교 한 곳을 선정해 ‘리빙랩 활용 안전한 통학로 만들기 사업’을 시범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통학로와 밀접한 학생·학부모·학교·주민, 유관기관인 지자체·교육청·경찰, 이를 자문할 전문가 그룹 등을 한 데 모아 지역 여건에 맞는 통학로 안전 해법을 찾고자 하는 취지다.
이미경 시 보행도시정책과장은 “문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주민인데, 이들이 해결 방안도 잘 찾아낼 수 있다. 통학로 안전 개선에 대해 그 학교만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발견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시민의 인식 개선을 기대했다. 그는 “관에서 주도하는 정책과 다르게 시민이 직접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면 이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될 것”이라며 “예컨대 학부모가 자신의 견해대로 개선해야 한다고 고수하는 상황에서 리빙랩이 이뤄진다면 교통 전문가나 운전자 등의 의견도 들어볼 수 있게 된다. 대화하는 과정에서 의견이 절충되리라 예상한다”고 밝혔다.
정회순 청동초 학부모회장은 “어느 한쪽 말만 들어서는 바뀌는 게 없다. 각자의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에 소통하다 보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면서 사업에 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배 대표 또한 “관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영상=김채호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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