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에 갇혀 2년… 세기를 넘는 고독의 무게 상상 통해 재구성했죠”

김용출 2023. 11. 7.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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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박경리문학상’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
대표작 ‘빙하와 어둠의 공포’
1872년 조난 사건 모티브
기록들 간극 허구로 채워
“북극 향한 여정 그리는 등
상상 속 인물로 소설 전개
덕분에 현실과 과거 이어”
전후 오스트리아 태생 작가
“소설 ‘모르부스 키타하라’
현실 속 남아있던 나치 잔재
일상 곳곳에서 대면 묘사”

북극을 탐험하려던 사람들이 인간이나 동물, 또는 주변의 풍경 변화 없이 2년 동안 같은 배 안에서 생활하면서 과연 무엇을 경험했던 것일까.

언젠가 오스트리아-헝가리 북극 탐험대가 1872년부터 2년여 악전고투 끝에 프란츠요제프제도를 탐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제도는 북극 근처의 북위 79도와 81도, 동경 44도와 62도 사이에 위치한 190여 개의 무인도로 이뤄진 곳. 그런데 탐험대는 항구를 출발한 지 14일 만에 얼어붙은 바다 한가운데 갇히고, 그로부터 2년간 북극해에서 혹독한 추위와 빙하의 위협, 식량 부족과 질병, 그리고 절대 고독과 죽음의 공포를 겪어야 했다. 24명의 탐험대가 같은 배 안에서 무려 2년간 생활했다니….
북극을 정복하기 위해 떠난 탐험대의 분투기를 그린 ‘빙하와 어둠의 공포’ 등을 쓴 오스트리아 작가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가 올해 박경리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앞으로도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정보를 수용하되 현실과 동시에 허구와 연결시켜서 쓰는 방식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스트리아 소설가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는 북극 빙하에 끼인 배 속에 2년여 갇혀 있던 탐험대의 모습이 감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먼저 북극 탐험대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탐험대를 다룬 역사책은 물론 대원들이 남긴 회고록이나 수기를 찾아 읽었다. 탐험에 나선 배와 관련된 지식을 정리하기도 했다. 최대한 역사적 고증이나 확인을 했다.

모르는 부분이나 빈 곳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탐험대원들이 결빙된 북극 근처의 배 안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지. 사실 사이의 빈 간극을 자료와 고증을 바탕으로 상상했다. 그에게 상상은 시각적이었다. 심지어 역사적이고 객관적 사실조차 상상을 통해서 허구로 재구성해야 했다.

“역사소설이 아니었지만, 당연히 역사적인 고증 확인을 했습니다. 역사 자료를 많이 찾아봤어요. 그럼에도 모르는 부분은 상상으로 채울 수 있었기에 좋았습니다. 고증 후에 그것을 다시 상상력을 통해서 허구로 만드는 것이 오히려 어려웠어요. 고증을 통한 현실이 확실히 있었지만, 그것을 허구로 옮기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저에겐 혁명적인 작업이었습니다.”

란스마이어는 19세기 말 제국주의 기치 아래 지구상에 남은 미지의 땅 북극을 정복하기 위해 떠난 탐험대의 분투기를 담은 장편소설 ‘빙하와 어둠의 공포’(진일상 옮김, 문학동네·사진)를 1984년 발표했다.
작품은 화자인 ‘나’가 19세기 말 북극의 빙하 사이에 갇힌 탐험대를 쫓아가되, 이들 탐험대에 빠져서 1981년 직접 탐험에 나섰다가 사라진 허구적 인물 요제프 마치니를 매개로 ‘나’와 탐험대와 마치니의 세 개 시선을 따라 전개된다. 1872년 8월 노르웨이 트롬쇠항에서 북극을 향해 떠나며 시작된 탐험대의 여정은 선장과 측량사, 사냥꾼 등이 남긴 스케치와 일기, 편지 등 기록을 따라, 기록 사이에 채워지지 않는 빈틈은 상상을 통해 천천히 펼쳐진다. 14일 만에 북극 빙하 사이에 갇힌 이들은 2년간 오도 가도 못 하게 된 배 안에 갇혀 지내게 된다.

“트롬쇠항을 출발한 지 14일 만에 얼어붙은 바다가 사방에서 테게트호프호로 다가온다. 어디에도 열린 바닷길은 없다. 테게트호프호는 이제 배가 아니라 하나의 오두막이다. 얼음 덩어리 사이에 꼼짝없이 갇힌, 피난처이자 감옥이다. 돛은 아무런 소용없는 천 조각일 뿐이다.”

거대한 빙하를 깨고 배를 앞으로 나아가려 시도했지만 요지부동.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햇빛 한 점 없는 긴 어둠,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추위, 외로움, 배를 향해 점점 좁혀오는 빙하의 압력, 동상은 물론 괴혈병에 환각까지…. 사냥꾼이자 개 썰매꾼 할러는 태양이 사라지는 날을 이렇게 적었다.

“10월31일, 목요일. 날씨 맑음. 배 주위의 얼음은 꽤 조용하다. 중위의 모피 장화를 계속 만들었다. 10월30일에 마지막 태양을 보았다. 10월31일에 마지막 바다 갈매기를 보았다. 포경꾼이 바다 갈매기를 쏘아 죽였다.”

악전고투 끝에 탐험대는 2년 만인 1874년 8월 러시아 포경선에 의해서 구조된다. 출발지 빈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모두 847일. 그들은 북극에 제국의 깃발을 꽂았다며 잠시 영웅으로 환대받지만 곧 비아냥과 수군거림의 대상으로 전락한 뒤 가난 속에 살다가 외롭게 사라진다.

대표작 ‘빙하와 어둠의 공포’를 비롯해 야심만만한 작품을 잇달아 발표해 온 란스마이어 작가가 올해 제12회 박경리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문학상 심사위원단은 “다양한 메시지와 탁월한 문체를 통해 소설의 존재감을 상기시키는 한편, 시간의 부침에 저항하는 문학의 가치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선정 배경을 설명했다.

란스마이어는 19세기 말 북극 탐험대의 여정과 모험과 공포를 어떻게 그렸을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박경리문학상 수상을 위해 내한한 란스마이어 작가를 지난 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간담회로 만났다.
―소설 전개의 주요한 인물이 되는 요제프 마치니는 어떤 인물인가요.

“허구의 인물입니다. 허구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과 과거를 이을 수 있었고, 현실의 입장에서 과거를 보는 것을 그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북극을 향해 항해하기도 하고, 거기에서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것을 상상할 수 있었죠. 사람이 북쪽으로 가고자 하는 의지 같은 것을 그렸던 것 같습니다.”

―작품에서 모험이나 여행이 많이 나오는데, 모험 여행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요.

“제 작품에서 동시성을 찾아볼 수도 있고, 여행을 하면서 많은 장소와 시간을 보실 수 있을 텐데요. 시간과 장소는 바뀌더라도 사람들이 현실을 살아가긴 힘이 듭니다. 예를 들면 유럽이든 한국이든 혹은 지금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가자지구이든 어디에 사는 사람이든 간에. 앙코르와트의 건축물이나 중국의 만리장성, 로마의 위대한 건축물들은 그대로 있지만, 그것을 만든 사람들은 모두 죽고 없죠. 제가 글로써 시도하고 싶은 것은 그 사람들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건축물을 만들면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갈망했는지, 어떤 것에서 고통을 받았는지, 그들의 일상은 어떠했는지를.”

1954년 오스트리아 벨스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란스마이어는 1982년 인류 몰락을 그린 첫 소설 ‘찬란한 종말’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결합해 엮은 ‘빙하와 어둠의 공포’,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를 소재로 한 ‘최후의 세계’, ‘날아다니는 산’, ‘범죄자 오디세우스’, ‘불안한 남자의 아틀라스’ 등의 소설을 발표했다. 엘리아스 카네티 문학상, 하인리히 뵐 문학상, 루트비히 뵈르네상 등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역사적 사회적 환경이 작품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요.

“오스트리아는 현재 평화롭습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나치와 히틀러 때문에 상당히 야만적이었어요. 살던 마을에서 4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히틀러 무리가 파괴한 장소도 있고, 거기서 몇 km 떨어지지 않은 곳에 수용소도 있었고요. 대학을 다닌 빈에서 유대인 생존자 자식인 유대인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고,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나치 정권은 사라졌지만, 법이나 정치, 일상 곳곳에서 과거를 현재에서도 대면해야 되는 상황이었어요. 소설 ‘모르부스 키타하라’는 이 같은 동기에서 썼지요.”

큰 키와 긴 콧수염이 인상적이던 란스마이어는 이날 간담회 내내 진지한 모습으로 기자들의 질문에 답했다. 때론 자신의 작품을 예로 보여주거나, 때론 우리가 보지 못한 면을 보여줬다. 클릭 몇 번으로 비행기 편만 해결된다면 적도나 극지 여행도 문제없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 얼마나 안이하고 환상인지도. 그러니까 차분해 보이는 저 북극이나 남극, 바다를 몸으로 직접 부딪친다면 거기에는 수천, 수만 년간 인류가 부딪치고 고민해온 놀라운 모험과 강렬한 기억과 끔찍한 고통과 겪고 싶지 않은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고.

“우리의 항공로는 여행 시간을 말도 안 될 만큼 단축시키긴 했지만 거리를 단축시킨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거리는 예나 지금이나 어마어마한 것이다. 항공로는 단지 하나의 선일 뿐이고 길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자. 우리는 외면상, 단지 걷거나 달리는 사람일 뿐이니까.”

글·사진=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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